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패션의 거장 이상봉, 한국의 산하를 걷다

패션 큐레이터 2011. 4. 8. 20:32

 

 

이번 서울 패션 위크에서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의

2011년 F/W 작품을 보고 왔습니다. 제일 앞줄에서 보는 영광을

누릴 줄이야. 사실 이번 작품들의 테마에 대해서는 지난번 메종에 놀러갔다가

개략적인 내용을 들었던 터라, 런웨이장에서 바람처럼 명멸하는 이미지들의 숲 안에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가의 테마에 녹아든 모티브는 너무나도 편안한

이 땅의 자연입니다. 아니 우리내 산하라고 표현하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겨울 산을 걸어본 분들은 아실 터입니다.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핍진해진 겨울산을 걷다보면

 미만한 연두빛 봄도 아닌, 매미들이 고아대는 치열한 생존의

여름이 아닌, 인간들은 수확을 생각하지만, 다가올 하강의 시간에,

아득한 시간을 준비하는 겨울의 나무를 만납니다. 가지를 정리하고 결핍의

시간을 감내키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립니다. 이 나무앞에서

부산했던 인간은 다시 한번 지나온 날을 되돌아봅니다.

 

 

"억새는 흔들리면서 풍화한다. 바람에 흩어져 꽃씨를 퍼뜨리는 초겨울의 풀들은 가볍다.

풍화의 운명이 무겁고 쓰라릴수록, 그 모습은 저토록 가벼워야 옳으리라. 그러나 가벼움을 완성하고 가벼움

속에서 풍화되어 죽어가야 하는 운명의 내면은 가볍지 않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 중에서 

 

김준권 <산에게> 1002, 채묵목판,

 

이상하리만치 이번 이상봉 선생님의 런웨이를 보면서

떠올랐던 한국의 판화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김준권 선생님입니다.

옅은 연두와 황토를 그러데이션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의 이미지가

바로 이번 패션 작품을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산하를 옮기는

두 장인의 손길과 정신이 다른 공간에서 만난다고 할까요? 

 

김준권 <산에게> 1002, 채묵목판,

 

맑고 서늘하게, 목판에 새겨 먹으로 찍은

김준권 작가의 다색판은 수묵의 농담변화가 가진 담백함이

소쇄한 풍경과 어울려 한 폭의 수묵산수를 오랜시간 곰삭여 추출해낸

듯한 느낌이 듭니다. 겹겹히 포개어진 능선은 전통적 문인화에서 보여주는 정신의

복합성과 소리없이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능력을 선비의 마음을 보여주죠

 

 

눈 내리는 내설악, 산을 등정하며 디자이너는

자연이 그려낸, 오랜 역사의 시간이 빚은 산의 실루엣에

반했나 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이란 의미를 규정할 때, 자연과

인공이란 케케묵은 범주를 여전히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거대한 산과 들과 바다를 빚는 조형자로서의 신의 손길이 예술가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자연 속을 걷다보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이라고 말했던 어느 시인의 글처럼, 우리는

자연을 볼때, 내 안에 끓어오르던 한 시절의 열정과 아픔과 상처들을 던지고

그것이 자아내는 치유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디자이너에게도 그랬을 겁니다. 오랜 세월

지치지 않고 런웨이 무대를 장식해왔던 한국패션의 거장에게, 자연은 단순하게

창의적인 생각만을 잉태시킨 장소가 아닐겁니다. 오랜세월을 버티며

견뎌온, 이 치열한 디자이너의 생을 반추케 한 공간이었겠죠.

 

이번 컬렉션 속에는 설악의 풍경을 넘어

자연이 행사한 모든 선의 구도와 세밀한 의도가 옷 속

깊숙이 배어납니다. 세월이 갈수록 한국의 것이 더욱 좋아진다는

디자이너는 산수화의 정결함에 빠졌고, 물 흐르는 듯, 유연한 곡선과 수평선이

공존하며 조형하는 바람과 구름의 모자이크를, 자수 디테일과 직접 한정염색한 직물을 이용

표현했습니다. 동양적 선에 대한 물음은 울과 실크, 면, 가죽과 같은 자연스러운

소재와 만나, 더욱 선적인 느낌마저 가미했습니다.

   

 

무늬가 돋을새김된 클로케 디테일과 어우러진

가죽 재킷이며 우아한 패딩이 눈길을 끕니다. 가죽 위로

땀땀이 새겨낸 복화는 편안하고도, 내밀한 이 땅의 산이랑과 골을

닮았습니다. 재킷 아래로 퍼지는 촘촘한 플리츠 주름의 우아함은 이랑의

공백을 아름답게 메우지요. 빛과 바람과 습기를 걸러내고 아늑과 서늘함, 마름과 젖음,

소리와 적막의 이중성을 조형하는 자연의 손길을 응고시킨, 디자이너의

집중력이 유독 눈에 띤건 바로 이런 요소 때문일겁니다. 

 

 

자연의 기운을 물씬 느끼게 했던

옷의 색상들이 런웨이를 보는 동안 예전 같으면

이미지를 놓칠새라, 초조해지고 긴장했을 저를 편안하게

안아주더군요. 골드를 포인트 컬러로 넣은 갈색과 베이지, 회색이

여러번의 조율을 거쳐, 염직된 흙색과 함께 컬렉션의 팔레트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이번 컬렉션이 좋았던 것은

과거의 선생님 작품들이 보여준 화려한 드레이프 주름을

넘어, 단아하고 정제된, (아니 그냥 정직한 이란 표현을 쓰겠습니다)

실루엣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거장이 될수록 풍화하는 영혼의 무게가

가벼운 법이어서, 핍진하게, 그러나 정결하게 자신의 골재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노장이 된 디자이너의 겸허가 드러나는 부분이지요.

 

 

다음 주 월요일에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세계에 대한 짧은 단평을 준비중인데요.

올 봄/여름 시즌을 위해서는 영화를 보고 고민해야 했는데, 이번 가을/겨울엔

적요한 수묵화의 공간 앞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단아한 한 편의 시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겨우 디자이너에 대한  넘치는 말들을 정제해 발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수고하셨다는 말 밖엔, 그저 조용히 되뇌어 보는 수 밖에요.

이 땅의 산하처럼, 흔들리지 않고 아름답게 우리 곁에

디자이너로 있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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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금요일 밤 12시 10분, KBS 1 TV 미술관에서

미술로 읽는 패션 이야기 두번째 강의가 펼쳐집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