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입고된 에블린 브래넌의<패션을 예측하는 법: Fashion Forecasting> 3판을 한자 한자 읽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대형서점에 있는 의상학 코너를 갈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제가 요 며칠, 한국의 의상학과를 비롯 아카데미의 한계와 게으름에 대한 질타의 글을 계속해서 올리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저는 디자이너나 패턴 메이커 혹은 머천다이저와 같이 현업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문제는 편하디 편하게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패션을 이론화하고, 선진 테크놀로지를 실험하고 이를 가르쳐야 할 분들에 대한 불만입니다. 저는 패션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여러분은 이 좋은 걸 온갖 열정을 다 바쳐 연구하고 몸을 던지지 않습니까? 답답합니다.
요즘 의상학과를 가보면 디자이너를 하겠다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유통업체 바이어나 머천다이저가 되겠다고 하지요. 솔직히 디자이너는 너무 힘들고 박봉인걸 아이들도 아는 까닭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대기업 백화점 의류팀에 들어가서 상품기획자나 바이어가 되면 대우가 많이 다르니까요. 저 스스로 경험했으니 왜 그러냐고 따지진 않겠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의상학과에서 학문의 로드맵을 구성해놓는 방식입니다. 패션 경영 섹터와 디자인 섹터로 나뉘었지요.
문제는 경영 섹터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경영학 복수전공하면서 당췌 의상학의 기초조차도 제대로 수업을 안듣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의상학과를 나왔어도 옷 한벌을 구성하고 만들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하나고요? 옷을 만들줄 모른다는 건, 타인이 만든 옷도 분석하고 쪼개어서 비평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저는 기성복 분석에 관한 책을 20번 넘게 읽었습니다. 2000년 초에 번역되어 나왔던 그 책을 한땀한땀 읽으면서 공장에 따라가서 공정보고 배워야 했습니다. 전공을 안했으니 그렇게 공부해야지 뭐 별수있나요? 옷을 만들어보지 않은 이가, 타인의 옷을 보고, 어떻게 맵시와 라인과 스타일과 피트를 발견하고 모순점들을 찾아낼까요?
이건 약과입니다. 그나마 경영학 섹터로 가면 뭐합니까? 디자인과 색채, 라인 개발에 관해 소비자 의견은 오디팅하고 추출해내는 기술 조차 하나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 뭘한다고 하던가요? 툭하면 스펙 올려서 럭셔리 브랜드의 해외 매니저로 가겠다 그러는데, 가면 뭐한답니까? 그 브랜드의 역사와 옷의 본질적인 특성 조차도 파악을 못하고 가는데다, 영어 잘하는 아이들 뽑을 양이면 아예 현지에서 석사한 친구를 뽑죠.
패션을 예측한다는 것은 한 시대의 정서의 표면과 내면을 기호를 읽듯 읽어내야 하는 과정입니다. 기술과 내구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툭하면 외국 자료만 베껴서 쓰는 거잖아요. 아니던가요? 한국의 넬리로디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넬리 로디는 패션 예측을 하고 싶다면 사회학과 인류학, 문학 부터 공부하라고 말하던 사람이 아니던가요? 에블린 브래넌의 <패션 예측>도 결국은 모든 것은 사회문화적 지표를 읽는 능력으로 귀결됩니다. 이 테크닉은 결코 의상학과의 단순 교육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석사하고 박사하면 좀 나아지지 않나고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인문학을 토대로 한 상상력의 전개란 결코, 수사학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도록, 소비자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정서의 구조를 읽어서 그들에게 답을 줘야만 집단 행동의 동태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경영학 교육이, 그저 하버드에서 나온 책만 본다고 이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 경영학과 교수들이 하나같이 한심한 소리 하는거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렇게 쓴 소리를 합니다. SPSS만 잘 돌리면 숫자로 소비자를 읽을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통계는 저도 잘해요. 세상이 그렇게 안읽혀지니 문제지요. 결국 모든 답은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추상적이기에, 실타래에서 답을 얻어내기 위해선 손과 발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결국 인류학자의 눈과 발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문화탐색이란 게 무슨 공연보러가고 파티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부상하지 않은 하위문화들의 결과 속살을 들여다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여기에서 미래의 대안이 될 만한 것들을 추출해 낼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거죠. 아이들에게 경영학 책 보다 차라리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같은 책을 읽게 하는게 일본 패션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하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트 디렉터나 패션 디렉터가 되려고 해도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 예측과 기민한 반응능력입니다. 제발 기본도서들, 텍스트들을 학문 공동체에서 열심히 번역했으면 좋겠어요. 의상학과 학생들이 책을 안본다고 탓하지 마세요. 맨날 봉제/재단과 구닥다리 일러스트 책 밖엔 없는 이 땅의 의상학 코네에서 뭘 기대하란 것인지요? 교수님들 탓이 너무 큽니다. 저같이 경영전공자가 툭하면 패션 경영책 찾아서 번역하고 출간하도록 발이 땀나도록 뛰어다니게 한 건, 기존 학계의 게으름과 나태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밖에는 안보입니다. 저 패션 비즈니스 책 번역하느라 머리카락 절반을 쥐어 뜯었습니다. 미안하지 않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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