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미술에도 법이 있다, 그래 법대로 하자

패션 큐레이터 2011. 9. 3. 00:55

 

 

미술과 법, 패션을 건들다

 

꽤 오랜동안 패션 큐레이터의 서재를 제대로 꾸미지 못했다. 매달 쏟아지는 외국의 디자인 관련 신서들과 매거진, 자료집과 스와치북, 각종 패션이론서들을 망라하는 내 서재는 점점 더 늘어가는 책의 컬렉션을 보유하기엔 턱없이 좁다. 게다가 욕심이 앞서서 사기만 하고,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채 꽂아두는 책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이런 정신의 부끄러움에 한 몫을 한다. 지난 두 달 동안 100여권의 원서를 구매했다. 패션 디자인의 방법론을 다룬 책과 패션산업의 동태적인 측면들을 살펴볼 수 있는 비즈니스 책과 원가계산을 다룬 실무 책에서 부터, 신인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업들을 모아놓은 작품집, 구두 디자이너들의 작품집, 최신의 란제리 디자인을 모은 도록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정신이 없다.

 

신간 원서들은 시간을 내어 조금씩 풀기로 하자. 오늘 소개할 책은 한글판 도서다. 미술을 망라한 예술관련법을 가르치는 김형진 교수가 쓴 <미술법>이다. 왜 미술법 책을 패션 큐레이터의 서재에서 소개하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을거다. 이 책은 사례중심이라 읽기가 편하다. 그만큼 느슨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타 장르의 관련 법 조항과 사례도 다루기 때문에 이 책을 샀다. 특히 패션을 미술법의 영역에서 다루었고, 장르로서 인정하기에 상표권을 비롯, 저작권에 대한 사례를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한때 미술관련 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홍익대가 로스쿨에서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홍익대 미대에서 미술법 관련 변호사들을 키우겠다고 했을때, 사실 욕심이 컸다. 2000년 겨울 접어들면서 나는 저명한 미술관련 변호사인 레오나드 듀보프가 쓴 <Art Law>를 열심히 읽었다. 관련 조항과 사례를 간명하게 설명해놓은 시리즈 중 하나였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최근에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가이드> 번역을 마쳤다. 교정도 어느 정도 끝나간다. 이 책이 나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분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이 땅에서 패션산업의 실무를, 실제 디자이너들과 업계의 실무진들을 인터뷰하면서 소개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바로 '짝퉁'을 둘러싼 법적 문제들과 변호사 선임문제, 비용 등의 문제를 다룬다. 최근 미국의 국회를 통과한 패션 디자인 보호법에 따라, 기술된 내용이 추가되었다. 여기에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패션의 저작권 내용을 함께 보면 좋을 듯 하다.

 

사실 뭉뚱그려놓은 느낌도 없진 않다. 사례 중심이라 깊게 들어가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프랑스가 한국정부에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일부를 반환했다. 그만큼 미술작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법의 담론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터. 유럽국가들은 도난사건이 발생한 후, 시효가 지나면 원소유자의 권리가 없다고 천명한다. 영미법과 다른 체계인데, 뒤집어 보면 이런 식의 법적용을 통해 완성된 미술품의 궁전이 바로 루브르다. 오죽하면 '약탈물들의 전시장'이란 표현을 쓰겠는가? 영국만 해도 약탈 미술품으로 가득 매운 대영박물관을 비롯, 국립 미술관을 모든 이들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소유권 투쟁에서 '보존' 장소로서의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미술과 법은 만나지 않는게 상책이라지만, 꼭 그렇지 않다. 여전히 미술품과 디자인 작업에서 인간의 '구상노동'을 은근히 깔아뭉개고, 쉽게 써먹으려 하는 대기업(굴지의 패션기업 H는 디스플레이 과정에서 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배껴냈다. 천만원으로 입막음을 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이런 식의 도용들이 더 이상 쉽게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들의 생리와 관행이란 이름으로 빚어지는 잘못들을,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예술가들도 일정 부분 이해해야 할, 부분들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