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패션 큐레이터의 서재에는 30여 권의 책이 입고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올 3월 26일부터 샌프란시스코의 디용 미술관에서 시작된 전시를 묶은 도록입니다. 바로 스페인이 낳은 패션의 거장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의 전시인데요. 이번 전시 제목은 <발렌시아가와 스페인>입니다. 스페인 미술의 전통 아래, 패션 디자이너 발렌시아가의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의미를 부여해보는 멋진 전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한예종 자유예술캠프에서 복식사와 영화 강의를 하면서 종종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1950년대 역사상 가장 화려한 패션이 꿈틀거렸던 시대의 의상들을 주제로 책을 써보면 어떤가? 였지요. 물론 저는 이 시대를 적어도 오트 쿠튀르의 황금시대라 불린 이 시간의 축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 축 위에 나란히 서있는 디오르와 발렌시아가가 이죠. 책을 쓰곤 있지만, 사진 저작권 처리가 만만치 않습니다. 항상 그래왔듯 책을 써봐야 인세 받아서 저작권료로 다 나가야 할 듯 해서요. 많이 망설이고 있지요. |
지난 번 발레 <돈키호테>의 리뷰를 쓰면서 스페인의 열정과 패션에 대해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스페인은 분명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해있습니다만, 항상 유럽에선 '이국적'이란 수사가 붙는 나라였습니다.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가장 치열하게 식민지 침탈을 했던 나라지요. 그렇다 보니 사실상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물품들이 손쉽게 교역되던 유일한 장소였고, 식민지로 만든 동양의 다양한 이미지가 병치되어 유럽에 속해있으나 독특한 그들만의 문화적인 언어를 만들게 됩니다. 이번 전시는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 전통의 영향이 발렌시아가의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복되어 등장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
이번 전시는 6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발렌시아가와 스페인의 상호영향을 살펴봅니다. 스페니시 아트, 민속복식 스페인의 궁정, 종교 적인 삶과 예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투우와 플라맹코를 포함한 민속 춤입니다. 이 모든 게 그의 옷에 오롯하게 박혀 있다는 걸 밝히는 과정은 꽤나 지난하고 어려웠을겁니다. 유럽판 보그의 에디터인 헤미쉬 보울즈가 게스트 큐레이터로 이번 전시를 맡았는데요. 이번 전시에 출품된 220여점의 옷은 프랑스와 스페인, 미국 등지의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것입니다. |
발렌시아가는 공부하면 할 수록 신비한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의 의상학책들을 뒤져봐야 그에 대해 논평한 것이라곤 오트 쿠튀르의 황금시대를 장식한 두 장인 정도의 논평이지요. 너무 얼머무린 듯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한국의 의상학 교육, 그 중에서도 복식사와 패션 문화 문과를 다룬 교과서들을 볼 때마다 답답합니다. 패션을 항상 스타일 중심으로 규정하다 보니, 옷 이름만 외우고 있고, 그 옷에 담긴, 적층된 문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풀어낼 능력도 시각도 갖고 있지 않은 경우를 수도 없이 봤습니다. 텍스트 하나만 봐도 기술적인 정리가 대부분이죠. 이런 바탕에서 <발렌시아가와 스페인>같은 전시는 탄생하지 못합니다. 설령 한국의 보그지에서 일하는 저명한 에디터를 갖다놔도 마찬가집니다. 이 바탕이 어디갈까요? 얄팍한 내용으로 머리를 채우고 공부해온 한계를 스스로 알고 몰드를 깨뜨려야 하는데, 자칭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인간들이 더 아는게 없으니, 이제는 그들에게 기대를 버렸습니다. |
발렌시아가에 대해 공부하면서 다시 한번 서반아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걸 한탄해봅니다. 툭하면 영미권 자료만 갖다 레퍼런스로 사용하는 한국의 학계의 못된 버릇을 생각해보면, 민속복식에 대해 나온 책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이 시점에서, 발렌시아가를 공부하는 과정은 이전의 접근법을 완전히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전시도 그 정도의 수준을 이끌어낸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시각에 젖은 큐레이터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
아무래도 올 여름, 스페인에 장기 출장을 가든, 여행을 가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보테가나 공방들의 장인들도 실제 만나보고, 섬세한 디테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의 비망록과 일기를 철저하게 읽으면서 추적해 보는 수 밖에요. |
저는 패션에 대해 공부하면서, 서재에 책이 쌓여갈 때마다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과연 패션은 무엇인가? 라고요. 그것은 단순하게 옷을 만드는 기술이나 일러스트를 그리는 기술, 봉제와 재단의 의미만을 추적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맨날 패션이라고 하면 공항패션의 종결자나 스타일리스트의 어설픈 충고들, 연예인들의 옷차림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니, 그저 패션에 대해 이야기 하면 머리가 비어도 한참 빈 골빈당 아이들의 전유물 정도로 치부될까 두렵습니다.
패션 전시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패션개념을 일반인들에게 확장하고 지금껏 존재해온 아니 상존하고 있는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옷의 존재론을 묻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이런 전시들을 개발하고 시연하는 외국의 큐레이터들이 참 부럽습니다. 한국패션협회 회장인가 하는 분이 패션 박물관 설립과 더불어 '패션 전문가들을 위촉하여'란 말을 하시던데, 저는 반대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자칭 패션 전문가들은 어디에 있나요? 그들이 내놓는 정책과 전략, 저술,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해외의 유수 패션 스쿨을 나오면 뭐한답니까?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수준이 외국의 것들을 소화해서 '나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할 동력과 바탕을 그들에게 준비시켜 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우리의 실제 수준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을 먹여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죠.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한탄섞인 말을 쓰고 있네요. 그래도 도록을 보는 시간, 스페인 미술사를 다시 한번 훓어야 겠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4월 8일 TV 미술관에서 <미술로 본 복식의 역사>를 강의합니다. 올해는 반드시 패션을 사유하는 두 권의 책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 노력해야죠.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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