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참 착한 영화를 본 것이. 깔끔하고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어가도 로맨스 영화가 좋은 걸 보니, 천상 로맨틱 가이로 살아야 하나.
두근 두근 감성로맨스란 판에 박은 듯한 포스터 문구가 눈에 걸리긴 했지만. 내 안에 연애 누룩이 강렬한 햇살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한 채 부풀어 오른 것을. 이 영화는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사랑,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부모님의 도시락 전문점 일을 돕고 있는 티엔커는 청각장애인 수영 경기장으로 배달을 나갔다가 언니 샤오펑을 응원하기 위해 온 양양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대학시절 배운 짧은 수화실력을 발휘해 그녀에게 말을 걸고, 데이트 신청도 해보지만, 썩 결과가 좋지 않다.
아프리카로 선교를 나간 전도사인 아버지를 대신, 언니를 돌보는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짬을 보통 내기가 쉽지 않다. MSN 메신저로 계속 말을 걸어보지만, 로그오프로 되어 있는 날이 대부분이니 마음만 애태울 뿐.
줄거리를 나열하는 건 이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 아니다. 로맨스 영화의 결론은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이고, 속칭 사랑에 빠지기 위해, 어떤 작업(?)멘트와 기술을 사용하는 가를 봐야한다. 더구나 오랜만에 대만에서 건너온 샤방샤방한 살결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아니던가.
청펀펀 감독의 <청설>은 청춘 로맨스 영화의 전형적인 문법을 지키되, 수화를 통한 의사소통이란 방식을 삽입함으로써, 따듯하고 즐거운 한편의 동화를 써냈다. 장애인을 다룬 영화는 꽤 많다. 다운증후군 환자가 주연이 되어 나왔던 <제8요일>,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의 연기가 평행선을 달리며 감동을 끄집어 냈던 <레인맨>,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자폐증에 걸린 형을 연기했다. 문소리가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한 <오아시스>까지. 장애인의 삶과 사랑이 영화 속 소재로 사용되는 건 그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처럼,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도록 하는 힘 때문이다. 이점에서 나는 1946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최고의 영화로 뽑곤 했다.
신체 장애를 선천성과 후천적인 요인으로 나눌 때, 전쟁이나 사고에 의한 후천적인 요소에 노출된 인간의 삶은, 상처가 더 깊기 마련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세 남자의 삶을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전쟁터에 나간 사이 바람난 아내, 가족은 물론 자신도 뭔가 변해버린 어색한 분위기, 전쟁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마무리된 후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상이군인들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이 영화에서 상이용사로 등장한 배우는 실제 양팔이 없는 장애인이고, 상이용사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다는 측면에서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S#2 사랑엔 말이 필요없다.....손으로 전하는 감성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는 말리 매틀린의 <작은 신의 아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사랑을 연결하고 지속시키는 힘이 바로 수화다. 소통을 위해 자연스레 습득해야 하는 언어의 세계를 극복하는 '손으로 빚는 소통의 힘'을 알게 해준 영화다. 장애인과 비 장애인이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편견의 극복이 급선무다. 영화 <청설>도 그렇다.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주인공 윌리엄 허트는 그녀가 떠난 후에야 '언어의 중요성'을 배운다. 막힌 담을 넘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화의 문법은, 사회적 관습을 통해 굳어진 견고한 편견의 세계를 넘는 '희망의 언어'를 투사한다는 점에서 '수화'를 통해 만들어가는 연애감정과 사랑의 세계는 그 차원이 훨씬 깊어질 수 밖에.
청펀펀 감독의 <청설>은 <작은 신의 아이들>처럼 신랄하게 가슴을 후벼파진 않는다. 여주인공을 가리켜 무슨 '새'를 닮았으니 하는 손발 오글거리는 멘트만 오간다. 구태스런 영화의 전개방식에도 불구하고 비주얼이 워낙 예쁜 탓인지, 스스로 자문한다. "나라면 청각장애인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라고. 대학시절 들어가고 싶었던 동아리가 수화를 배우는 서클이었다. 친구에게 등 떠빌려 광고 동아리에 들어가느라, 포기했지만, 이후 교회에서 수화 클래스에 들어가 손짓 언어들을 배우곤 했다.
손 마디마디가 신체부위와 접속해서 만드는 풍성한 어휘를 볼 때마다, 신체가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적 능력'에 대해 놀랐고, 신체를 빌려 표현하기에, 더욱 감성적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왔다. 그러나 수화를 배우는 것과, 그 언어를 통해 장애인과의 편견을 깨는 일, 소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들 부터 문을 쉽게 열지 않을 뿐더러, 비 장애인 또한 '돌봄'이나 '보살핌'의 개념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통의 답답함을 극복하기엔, 손이 그려내는 풍경이 무력할 수 있다.
문 살짝 열어젖히매 / 몸속으로 순식간에 쳐들어온 / 혹한의 당신 때문에 / 입술이 하얗게 만년설로 얼어버렸다 / 혀도 딱딱하게 빙하로 굳어버렸다 /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 준 얼음의 당신을 사랑한다고 / 말을 하고 싶은데 / 2월, 시샘달은 벌써 물고기자리별과 눈이 맞아 / 서울 어디로 달아나고 3월, 물오름달은 처녀자리와 손잡고 이제 막 마을의 언덕 넘어갔으니 / 바야흐로 4월 잎새달이라 봄비가 안부의 글 적어주었는데도 / 和答의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 그리움으로 애타는 심정을 / 누구도 아는지 모르는지 / 손으로 쓴 사랑의 언어를 눈빛으로나마 읽어달라고 / 목련꽃이 흰 붓으로 묵시默示의 글씨를 쓰고 있네 / 이팝나뭇잎이 푸른 물감을 묻혀 / 청량靑亮한 그림을 그리고 있네 / 얼어있는 내 마음을 흔드는 / 저 꽃의 몸짓이 야단스럽다 / 굳어있는 내 몸을 흔드는 / 저 잎의 손길이 정신이 없다 / 어느새 꽃 개화하고 잎 만발하니 나도 당신과 手話하고 싶다 -김종제의 <수화> 전편-
시를 읽고 있으려니, 손이 간질간질하다. 손 마디 마디 사이로 빠져나가는 여름 빛이 어루숭 어루숭 가렵다. 가벼운 로맨스 영화지만, 설정된 관계의 깊이가 좋고, 유모어도 잃지 않는다. 20 살 남짓의 어린 연인들의 말 장난을 보며, '나의 그때'를 되세겨보는 추억의 무게도 가볍다. 그래서 좋다. 가볍게 오후의 시간을 때우기엔 충분한 정도의 웃음이 있는 영화. 참고로 남자 주인공의 부모님이 양양을 만나 의사소통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아무래도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보고 감독이 감동을 많이 받은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분이 있어 영화는 더욱 즐겁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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