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이창동의 영화 <시>-장벽을 넘는 기적의 수화

패션 큐레이터 2010. 5. 27. 22:20

  

Prologue-시는 기적을 빚는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봤다.  여운이 독이 되어 몸 속에 퍼지는 것 같은 느낌. 3일이 지난 지금도 애써 내 안에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막고 있는 듯 하다. 칸 영화제의 각본상을 축하하기에 앞서, 예전 칸을 정복했던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기적의 시간>. 제목이 보여준 기적은 한국으로 순차가 넘어온 듯 하다. 문학 종언의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언어의 힘을 만난다. 시각과 청각, 최근 4차원 영상을 빌린 촉각과 공감각에 이르기까지, 다층감각의 형태로 인간의 인식을 조형하는 시대의 폭력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문학의 윤리성이 새로 부상한다. 그 시발점을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 <시>를 통해 보여준다. 나는 그를 통해 시의 힘을 배우고, 단아한 한편의 시를 쓰기로 작정했다. 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의 장벽 위로, 기적의 메시지를 보내는 영상수화의 문법은 오늘, 나를 사로잡는다. 속절없이 영상이란 텍스트의 제단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적이 있었던가?

 

S#1 강철군화의 시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강철군화>는 고전의 반열에 든 소설 <늑대개>의 작가 잭 런던이 쓴 작품이다. 190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경제적 부를 독점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제 사회를 그린다. 문제는 그가 상상력을 통해 추출해낸 소수사회의 비전이 오늘날 융기하는 사회문제들의 형상과 동질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갈등을 묘사한 르포문학이자 파시즘을 예언한 작품 <강철군화>. 소수 자본가를 위해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도록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 <시>와 소설<강철군화> 사이엔 직접적 상관관계는 없다. 영화 속 파출부 생활을 하며 생활보호대상자로, 딸의 이혼 후 맡겨진 중학생 손자 동욱과 사는 양미자. 그녀를 둘러싼 사회의 풍경은 <강철군화> 속에 묘사된 그것과 닮았다.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여중생을 둘러싼 중산층과 교육 담당자들이 보이는 은폐 기도는 가진자의 범죄는 잊혀지고, 무산자의 범죄는 형벌 당하는 이중적 모순의 사회적 자화상일 뿐. 영화 <시>는 이런 시대의 외피 속에서, 여린 꽃잎같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S#2 꽃이 흐른다, 물 위의 잔영 위로

 

영화에는 물과 꽃의 중첩된 이미자가 자주 등장한다. 양미자는 밝고 화사한 꽃무늬가 찍힌 옷을 즐겨 입는다. 모자와 스톨까지 걸친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한송이 무르익은 꽃의 현현이다. 왜 그녀는 꽃무늬 옷을 유독 입고 나오는 걸까? 꽃을 좋아하고 꽃의 군락이 우주의 리듬 속에 태어나는 화엄의 세계를 좋아해서일거다. 꽃 한 송이에 담긴 세계의 질서를 몸 속 깊이 내생적으로 아는 그녀. 그런 그녀가 시에 빠진다. 우연히 문화센터에서 시 강의를 들으며 시작에 몰두한다. 강사로 출연한 김용탁(택)은 실제 시인이다. 연기인지, 실제 강의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자연스런 느낌을 발산하는 시인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의 말이다. "시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예쁘게 깍은 연필과 백지만 있으면 배가 불렀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렇다. 시는 새롭게 잉태할 수 있는 희망을 벼리는 가능성의 넒은 우주를 담는다.

 

 

그녀는 시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려 노력한다. 내가 지금껏 먹었던 사과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속살을 쪼개고 맛보고, 껍질의 톳톳한 느낌을 이해해본다. 그럼에도 글은 쉽게 실타래 풀리듯 잉태되지 않는다. 이때 물 위로 여중생의 사체가 떠오른다. 아이의 이름은 박희진. 아네스란 세레명을 갖고 있다. 사건의 배후에는 손자 동욱이도 포함되어 있다. 학교 담당자들과 가해가의 아버지들은 돈으로 '화해'를 이루려 부단 애를 쓴다. 황미자가 시로 그리려 했던 아름다움의 세계에 침범한 이 담즙 같은 세상. 그녀는 진저리친다. 시 낭송 모임 후 회식자리에 들어온 김용택 시인과 황병승 시인(영화에 실제 시인으로 등장한다)은 시의 희망론과 무용론을 늘어놓는다. '시가 죽어간다'고. 시가 죽어간다기 보다, 글의 진정성과 휴머니티를 담아내야 할 그릇인 세상이 온통 균열의 틈새로 가득해서는 아닐까?

 

 

S#3 한 편의 단아한 시를 쓰기 위하여

 

영화 <시>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당당히 말하련다. 그 이상의 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조심스럽다. 문학적 상상력이 기반한 탄탄한 각본 위에, 덧입혀진 영상은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배열로 맥이 빠진다. 양미자가 손자를 위해 돈을 구하러 가는 모습,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며 물가에서 비오는 날, 모자를 날려버리고 빗물에 축축하게 젓은 백지 위로 시를 써내려 가는 모습, 이후 비에 젖은 채 피간병인인 회장과 육체관계를 맺는 그녀. 기호학을 들먹이자면, 물가는 죽음과 망각의 공간이다. 자신의 내면속에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단아한 시 한편을 남기고 싶은 그녀. 비가 내린다. 정화의 의미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속건제일 뿐. 비에 젖은 채 자신이 간병하는 '회장과 관계를 맺는다. 마초이즘과 성폭력, 남성들의 거세된 욕망을 상징하는 그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손자를 포함한 5명의 아이들의 손에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고, 동일한 값을 치러 죄의 사함을 얻는다.

 

 

그녀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지금껏 배워온 명사들을 하나씩 망각한다. 의사가 던지는 진단이 이상하리만치 존재론적 무게를 지닌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기엔 명사를 뒤로 가면서 동사를 잊어먹는단다. 그렇게 죽어간다고. 언어체계가 사멸하는 과정이 어찌 인간의 삶과 닮았음을, 그 유사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모든 언어를 잊어간다고, 그저 갓 태어났을 때, 엄마에게 사용하던 짦은 단어만이 떠올랐고 이 언어로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는 관습의 무게에 억눌린 사회의 사물, 언어의 외피를 뚦는 은빛탄환이다. 그 탄환을 빚는 힘은 인간의 영혼속에 잠재된, 아름다움을 찾는 욕구다. 이 느낌이 곧 시로 탄생한다. 정화된 몸으로, 상처가 더깨더깨 누적된 혀의 무게를 넘어갈 시간. 아직은 살아있은 동사의 힘을 빌어, 내면에 가득한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 가해자를 고소한다. 이제 남은 것은 속죄를 위해 한 줄의 시를 쓰고 죽는 일. 영화는 그녀의 자살을 처리하진 않는다. 열린 결말로 정리해둔다. 아니 그녀가 꼭 죽었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시의 가능성이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어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듯, 이창동 감독의 영상 텍스트 또한 그렇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성폭행을 하고도 풀려나고, 면죄부를 쉽게 부여해온 우리사회에서,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위해 그녀는 위악의 가면을 쓴 사회에 시 한 편을 던진다. 꽃을 입었던 여자는, 이제 꽃을 벗고 세상속에 즈려밟히지만, 뚝뚝 떨어지는 선혈자국은 시의 피가 되어, 인간의 가슴을 순환할 것이다.  인간은 시를 쓰는 존재다. 시를 쓰기 위해선 순수의 세계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강철군화로 짓밟힌 시대, 시로 저항하는 건 한 명의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다. 그것은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의 감성에 꽃물을 들이는 심미적 이성, 그것을 가진 모든 인간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각본상 수상작답게 영화 속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유해볼 만하다. 이렇게 좋은 각본에 0점을 부여한 영진위는 도대체 뭔가? 당시 심사위원을 했던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명단을 공개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든다. 얼빠진 정신으로 심사 하지 않는 한, 어떻게 0점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이창동 감독과 같이 좋은 분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시의 무용론이 판치는 시대, 여전히 유효한 시의 힘을 보여준, 이창동 감독의 <시>, 놀랍고도 놀랍다. 이런 영화가 자꾸 상영관 숫자가 줄다니, 보수쪽 표현을 빌어 '유감이다' 하긴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문광부에서 영진위원장 조 모씨의 사퇴를 정식으로 거론했단다. 꼬리를 자르는 셈이지만, 이 정도라도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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