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무섭고 기괴한
......그러나 따스한
꽤 오래전이지 싶다.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에 나온 한 명의 소설가에게 필이 꽂혔다. 나지막한 목소리, 여성적인 톤, 자그마한 체구와 가녀린 어깨선을 가진 여자. 바로 글쓰는 여자 한강이었다. 그녀는 작품집 <내 여자의 열매>중 '아홉개의 이야기'란 단상 중한 부분을 단아하게 읽어내려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짜가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울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를 걸을 때였지.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소리를 낸 순간."
그때 문득 떠오른 첫인상. '따스함' 그리고 '견고함' 이 두 개의 벡터공간 위에 서 있는 작가의 초상을 발견한 것이다. 단아한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온다. 소설이란 장르가 등장하기 전, 시는 문학의 왕좌에 있었다. 근대란 시간이 시작되며 '소설'의 역사도 시작된다. 장구한 인간의 삶과 그 배면에 어린 상처들을 묘사하는 소설은 시를 밀어내고 문학의 왕좌에 올라선다.
한강의 글은 인상주의 그림을 보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명멸하는 빛의 감성과 그 속에 놓여진 인간들의 시간, 마치 높은 곳에서 지상의 인간을 바라보는 듯한 신의 시간이 접목되는 순간. 인상주의의 시간은 그렇게 탄생한다. 단일한 섬으로 떠돌던 색채들이 하나씩 서로의 속살을 뚫고 상처를 이어 혼성배색을 만든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것은 과학주의란 미명으로 해석되는 '광학'과 기차의 탄생이 만든 '혼합배색'이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2005년 한강의 이상문학상 대상작 중 한 부분을 구성하는 단편이다.
물론 영화에선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연속적인 텍스트를 한 데 묶어 화면 속에 담았다. 몽고반점의 과거와 미래를 영화 속 프레임에 동시에 담았기에, 영화의 시간에서 풀어낸 소설의 시간이 궁금했고, 행간의 여백들을 무엇으로 채워낼지도 궁금했던 터. 소설 속 3편의 이야기는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현재'의 모습이다. 1시간 50분이란 시간 동안, 소설공간의 빛을 다 담아내긴 무리였을까? 영화 <채식주의자>는 안타까운 마음이 우선 드는 작품이다.
여자, 영혜......그녀는 갑자기 냉장고 문을 열고 쌓아놓은 고기들을 끄집어 내 버리려 한다. 꿈속에서 자신이 나무가 되었다며, 고기냄새를 맡지 못하겠다는 그녀. 채식주의가 된 그녀는 점점 말라간다. 앙상한 가지처럼. 채민서는 극 중 영혜를 연기하기 위해 8킬로그램을 감량했다고 했다. 가녀린 어깨선이 아닌 앙상한 뼈와 가죽으로만 이뤄진 여인의 뒷태를 보니 놀랍다. 사뭇 한 인간을 둘러싼 폭력적인 짐승의 세계를 떠올려본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거식증에 빠지게 한 것일까?
20살이 되도록 몽고반점이 있었다는 그녀.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형부는 그녀에게서 강렬한 예술의 영감을 느낀다. 그렇게 자신의 작업에 영혜를 끌어들이고 신체를 캔버스 삼아 화려한 꽃을 그린다. 인간을 화엄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꽃을 그림으로서, 스스로 나무라고 믿는 그녀에게 치유의 손길이 된다. 물론 꽃은 만개한 인간의 내밀한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 그 또한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린 후, 그녀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는 단순히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그건 포르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부하고 비루한 소재일 뿐이다. 영혜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꿈을 이야기한다. 그 꿈속에서 자신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다고, 그때서야 세상의 모든 나무는 두 팔을 땅에 짚고 선 물구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두 다리는 가지가 되고 그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쏟아진다. 마치 황금비를 뿌리는 구름으로 변신한 제우스가 다나에를 찾아가듯, 영화 화면은 두 팔 벌린 나무와 햇살이 중첩되면서 사라진다.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살아가야할 생의 무게는 한없이 크고, 비루한 일상의 아득한 시간을 견뎌내는 건 '환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한 문학평론가의 논평처럼 '우리가 꿈꾸는 것은 꽃의 세계이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짐승의 시간"이다. 한강은 짐승의 시간 속에 놓여진 채, 탐욕의 배면 으로 물려나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영혜를 통해서.
답답하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는 감성이다. 그녀가 창을 열고 온 몸에 햇살을 받을 때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상이다. 비루한 생의 무늬를 뚫고 나가는 한 줄기 꽃의 저항. 꽃이 되는 건,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 위함이다. 인간은 꽃을 통해 세상을 투사해왔다. 부처도 말하지 않았던가 꽃 한 송이의 개화와 짐에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그것이 지극한 화엄의 세계가 아닌 것이냐고. 꽃이 피기 위해 지난 계절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업'이 전제가 되듯, 꽃 한 송이는 인간이란 짐승의 가슴에, 아픔을 극복하는 삶의 불립문자를 세겨넣는다. 어떤 꽃은 죽은 이의 넋이 담기고, 또 어떤 꽃엔 애닮은 마음이, 붉은 핏기운이 돈다고 해설을 붙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꽃 한송이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 만으로, 우리는 생의 해답을 얻는다. 꽃 아래 경배를 바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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