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거절의 아픔을 겪을 때도 있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자기 스스로 덫에 걸리기도 한다. 혼자 지내는 날이 많다 보니, 몸이 아플 때가 가장 서럽다. 이럴 때 최고의 치료책은 의사 선생님이 써준 지시문 속 색색의 약들이 아니다. 손을 잡아주고 격려해주고 따스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것. 그것이 치유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은 바로 치료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나아가 일본이란 사회의 의료 체제, 그 속에 병렬되어 있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미술과 연극 영화, 무용, 장르에 관계없이 한국과 중국 일본의 예술작품 속에 드러난 현대의 삶의 조건은 유사하다. 아니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비춘다. 일본의 모습이 곧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일 수 있다는 믿음. 예술이란 공통의 언어로 추상화시킨 삶의 조건은 너무나 동질적이다. 두려울 정도로.
어느 시골 산간 마을. 누르면 연초록 물이 들것 같은 땅의 형상 위에 순박한 사람들이 산다. 무의촌이 될 뻔 했던 곳에 이노란 의사가 살고 있다. 그는 세심하게 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검진하고 좋지 않은 결론이 나올 때도 '당신에게 최선의 것을 해보자'는 말로 격려한다. 어느 날 동경에서 발령을 받아 온 인턴 의사 소마는 차사고와 더불어 마을에 상주하며 이노를 돕는다.
도쿄에서 발령 받아 온 인턴 의사 소마는 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세심하게 돌보는 이노와 함께 지내며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노가 갑자기 실종되고 경찰까지 출동하여 사라진 그의 행방을 찾아 수사를 펼친다.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신상을 탐문 조사하던 중 이노의 비밀스런 과거가 밝혀지게 된다. 그가 가짜의사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마치 50년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연출한 <라쇼몽>과 닮았다. 사건의 당사자들이 나와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인물'을 이야기 하면서 풀려나간다. 기억의 방식과 각각의 기억이 가진 빛깔은 달랐다. 인지 심리학을 하는 이들은 말한다. 기억만큼 고무줄 같은 게 없다고. 과거의 허구에 대해서도 현재 믿는 이가 '기억'을 통해 현재화 하면 과거는 언제나 사실로 둔갑한다. 이를 증명하는 임상실험들은 부지기수다. 정치권력이 과거의 사건을 '거짓'으로 만들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하는 미디어를 비롯한 매체의 힘은 바로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최근엔 벌이가 쉽지 않아 폐원하는 의사들도 급증했다. 도시란 공간에서 살아남는 방식이 점점 더 거칠고 한편으로 자본의 힘으로 갈무리 되기에, 자본이 없는 의사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럼에도 시골로 내려가거나, 의료 정신을 운운하며 무의촌 봉사를 이야기 하면 빰맞기 일쑤다. 자연을 거세한 무대위에 인공의 섬을 지은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을, 사회적 추방 혹은 인생의 낙오 정도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툭하면 1985년 이후로 한국 내부에 무의촌이 없다고 광고했지만, 실제통계는 다르다. 무의촌에 사는 노년층은 이동의 자유에 한계가 있어, 진료를 받기 위해선 큰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무의촌에 의사들을 보낼 유인책을 써야 하는데, 자본은 도시로만 집중되니 이마저도 어렵다.
영화 속 이노의 연봉은 2억. 그러나 도시의 의사들은 시골에 오지 않는다. 비가시적 가치의 총합이 2억을 상쇄하는 곳이 도시다. 치열한 만큼, 성공의 가능성도 크고, 판돈도 커진다. 영화 속 야메의사는 청진기를 들이대며 진료를 하고, 밤에는 의료서적을 펴놓고 공부한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의사인 자신의 딸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을 하고, 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가짜의사 연기는 완벽에 가깝고 이를 지켜본 소마는 병원장인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그의 뒤를 따라 이 동네에서 봉사를 하겠다고 자원한다. 일본의 의료체계 뿐만 아니라 한국도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동등이 아닌, 위계질서의 끈으로 묶여있다. 의사간의 관계 또한 그렇고. 환자는 징후와 증상을 가진 사물이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냉정한 균형감으로 유지되는 의료사회. 그 방식에 대한 회한이 영화 속엔 대사로 넘나든다.
제약 회사에서 배운 지식으로, 밤이면 공부를 해가며 환자를 치료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강압하지 않는다. 가짜의사의 행위를 변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노인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골에서 의사의 역할이란 어떤 것일까? 왜 그들은 의사를 찾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해 자연스레 풀어갈 뿐. 중요한 건, 그가 가짜임이 판명된 후, 시골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평가다. 면전에서 갖은 칭찬을 늘어놓던 이들은 변모한다. 무 자격증 의사에 대한 단죄와 평가는 기억속의 과거와는 판이한 형상을 띤다.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에 대한 물음. 영화의 울림은 진실을 위해 거짓의 옷을 입은 한 인간을 둘러싼 타자들의 평가기준에 있다.
감독 니시가와 미와는 미끄러지듯, 나른한 이야기의 진행 속, 행간에 조밀하게 삽입된 메시지의 힘을 선보인다. 개인과 개인 사이, 섬세하고 예민한 마음의 떨림과 교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이에 상응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이노 역을 맡은 쇼후쿠테이 츠루베는 만담가로 활동했다. 그의 연기 변신이 놀랍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방송을 하며 만가를 부르는 가수를 뵌 적이 있다. 만가란 말 그대로 즐거움을 주는 노래란 뜻이다. <오빠는 풍각쟁이>라는 노래는 3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 슬픔을 우회적으로 웃음을 통해 드러낸 노래란 말을 들었다. 영화 속 이노의 연기가 그랬다. 직접적으로 웃음을 주진 않지만, 그의 모든 진료행위의 행간에는 자격증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시대에 대한 슬픔이 배어난다. 가짜같은 진짜, 진짜 같은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 그것을 검증할 지식의 체계 조차도 인터넷만 켜면 다 볼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진정한 인간을 판명할 기준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당신에게 이 질문의 답을 요구한다.
영화 끝, 크레디트와 함께 들려오는 OST <웃음꽃> 가사가 참 좋다. 에둘러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때로는 곁눈질에 빠져 논두렁에 빠져도, 그런 길을 걸어본 이들은 안다. 더 먼거리를 걸어온 만큼, 삶의 나이테엔 웃음꽃이 필 균사들이 배어나게 될 거란 걸. 내가 죽으면 한줌의 재가 되어 웃음꽃을 피우겠어요. 그때 당신이 당신이라면 나 역시 나이겠지요. 되돌아 보면 지도도 없이 곁눈질만으로 고비고비 걸어 왔네요. 뜻대로 안 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게 인생이겠지요. 그 먼 길을 돌고 돌아서 걸을지라도 고비마다 어김없이 꽃은 피지요.
비가 계속 내리네요.
피아니스트 료 츠나자와의 연주로 듣는 '초록의 땅' 을 올립니다. 오늘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을 보러 갑니다. 다녀와서 리뷰 올리겠습니다.
'Art Holic > 영화에 홀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할 땐 손만 있으면 돼-영화 <청설> (0) | 2010.06.18 |
---|---|
이창동의 영화 <시>-장벽을 넘는 기적의 수화 (0) | 2010.05.27 |
여자는 왜 꽃이 되었을까-영화 '채식주의자' (0) | 2010.04.14 |
섹스 토이를 사고 싶을 때-영화'공기인형'리뷰 (0) | 2010.04.01 |
사랑은 맛있다-영화'사랑은 너무 복잡해' 리뷰 (0) | 2010.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