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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맛있다-영화'사랑은 너무 복잡해'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0. 3. 12. 06:30

 

 

 

S#1 연기기계, 메릴 스트립이 돌아왔다.

 

'연기기계' 난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 한 치의 오차없이 계산된 그녀의 연기는 감정을 계랑화해서 표현 할 수 있다는 연기이론의 희망사항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연기자 메릴 스트립을 존경한다. 그녀의 발성, 작품 속 인물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연기의 방식은 과학에 가깝다. 아니 연금술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같다. 알란 파큘라 감독이 연출했던 <소피의 선택>에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인간의 희망을 찬란한 연기로 보여주었던 그녀. 메릴 스트립이 나오는 영화는 그 이후로 다 찾아봤던 것 같다. 이후 로버트 드 니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디어 헌터>는 7번을 봤다. 

 

냉철한 수녀원장으로 나왔던 <다우트>, 프랑스에 사는 미국인 요리사를 연기했던 <줄리 & 줄리아>, 막강 권력을 휘두르는 패션계의 독재자로 분했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그녀의 작품의 필모그라피는, 그 내용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다양성이 숨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잊고 있었다. 아마도 1997년 가을이었을거다. 다이앤 키튼과 함께 연기했던 <마빈스 룸> 그 영화에서 백혈병에 걸린 언니와의 불편한 관계, 오랜 세월 누적된 상처를 드러내는 그녀의 내면연기는 이상하리만치, 눈에 걸렸다. 아마도 이때가 내겐 그녀의 정점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었을까? 그렇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만큼 사랑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없을 거란 점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기억하는가? 사랑에 빠진 중년여인의 심리를 그녀만큼 절제와 교감 사이를 오가며 절묘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연기자가 있는가? 난 그녀가 나오는 모든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쓸데없는 눈물을 쥐어짜게 하지도 않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레 드러낸다. 로맨틱 코미디 작품인 <사랑은 너무 복잡해>도 그런 연장선상 위에 있다.

 

S#2 여자들이 사랑 후에 원하는 것들

 

작가이자 감독인 낸시 마이어스, 2001년 <왓 위민 원트>란 원제 그대로의 영화를 통해 그녀와 만난 이후로, 매번 빠지지 않고 봤던 것 같다. 여자가 그린 여자의 사랑이야기. 우리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이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를 본다. 사랑이란 주제가 그렇다. 해볼만큼 해봤고, 경험해 본 이 '사랑'이란 문제의 실체에 대해 남과 여의 입장은 매우 다른 축을 형성한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는 바로 여전히 이혼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혹은 이겨내고 있는 과정 속의 한 여자를 다룬다. 낸시 마이어스는 귀신이다. 그녀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행복한 결말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줄 뿐. 어떤 선택도 지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혼 후 베이커리 가게를 차리고, 파티셰로 성공한 메릴 스트립, 안정된 생활을 유지해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20살 어린 젊은 여자와 재혼한 변호사 출신의 전 남편 제이크(알렉 볼드윈)가 찾아온다. 결혼 전 연애시절을 돌아가려는 제이크. 동시에 제인의 집 인테리어 공사를 맡은 건축가 아담(스티브 마틴)이 제인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어떤 쪽을 선택할까? 그녀를 둘러싼  세명의 아이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중후반의 인생을 살아낸 이들에게, 사랑이란 주제가 더욱 복잡한 것은 이렇게 주변부에 딸린 시선과 입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 아내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도, 그 남자의 사랑에 함께 빠지는 여자의 모습도, 이혼을 극복하고 또 다른 사랑을 꿈꾸려 하는 남자의 모습도 그저 예쁠 분이다. 참 곱게도 이야기를 빚었다. 이혼의 사유를 꼬치 꼬치 캐묻지도 않는다. 툭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내뱉는 핑계 중 하나가 '성격차이'아니던가? 그들 또한 이 덫에 걸려 이혼을 했을거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여전히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을 기억해 냈을거고 말이다.

 

 

 

50대에 접어든 여자의 심리를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의 모습이 참 좋다. 눈꺼풀이 자꾸 쳐지는 탓에 성형수술을 고민하는 여자.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초컬릿 케이크를 만드는 여자답게, 그 사랑의 과정 하나하나가 달콤하다. 초컬릿 케이크는 누가 먹어도 달지만, 그걸 묘사할 수 있는 감성의 깊이는 세월에 따라,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상처를 극복해왔는가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은근히 패션 스타일이 사는 메릴 스트립을 만날 수 있다. 디자이너 소니아 그랑드는 50대 여인에게 필요한 색감과 실루엣, 소품을 하나씩 보여준다. 성기게 짠 트위트 수트나, 화이트 레이스가 환하게 달린 원피스도 곱다. 여자는 40의 나이가 될 때, 무엇보다 '옷장'을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브렌다 킨셀의 말이다. 옷을 고르는 일은 남자를 고르는 일과 같다. 꼬리표에 반해서 골라도 안되고, 옷을 사기 전, 고칠 생각부터 하는 것도 금물이다. 드라마에서 그녀의 옷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을 잘 살펴보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낸시 마이어스의 연출력에 감탄했다. 우리는 흔히 '섬세하다'란 형용사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섬세하다는 것은 뭘까? 놓치기 쉬운 것들을 화면 속에 오롯하게 담아낸다는 뜻이라면, 그 점에서 낸시 마이어스는 합격점이다. 로맨틱 코미디 답게, 베드신도 종종 들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언뜻 언뜻, 50대 여성과 남성, 그 몸에 대해 보여주는 시선이 참 좋았다. 나이든 육체에 대해 유독 점수가 짠 이 세대에겐, 사랑의 과정에 있는 이들의 몸이 왜 그리 예뻐보이던지. 파티쉐의 주름진 손목과, 요리를 하며 얻은 손과 팔뚝의 상처들이, 유독 눈에 걸렸다. 젊고 탄탄한 여자와 남자의 몸에 환호하는 요즘, 세월이 조형한 자연스런 인간의 몸을 보는 따스함도 한번쯤 기억해 보면 어떨까? 여기에 영화음악의 천재 한스 짐머의 곡이 화면 곳곳에 아련하게 박혀 나온다.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경박하지 않은, 우아함. 샤넬이 그랬던가? 럭셔리의 반대는 천박함이라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이지 럭셔리하다. 50대 여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사랑의 사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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