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러브레터를 쓰고 싶다-권경엽의 그림을 보다가

패션 큐레이터 2010. 4. 27. 12:33

 

 

권경엽 <표백된 기억>

162.2X227.3cm oil on canvas 2009

 

S#1 전화기 앞에서

 

권경엽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장흥의 한 레지던시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녀. 캔버스에 집중하다, 부랴부랴 들려온 링소리에 놀랐던 탓일까요. 사진처럼 극 사실주의적인 신체와 풍경을 그리다보니, 작업 도중 흐름이 끊어지면 힘이 빠질 터. 목에 걸린 침묵이 끅끅 소리를 내며 반가움으로 바뀝니다. 걸리는 시간은 7초. <하하 미술관>을 계기로 알게된 사이지만, 유독 작가 권경엽에게 갖고 있는 애정의 깊이는 남다른 편이랍니다. 다른 작가분들에겐 전화도 잘 못했습니다. 출간 후 책을 보내거나, 전시가 있을 때, 인사하러 가는 정도가 전부였던거 인정합니다.

 

권 작가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장흥 또한 퇴근 후나, 혹은 그나마 쉼의 시간을 갖는 주말을 이용, 만나 보러 행장을 꾸미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술 정보들을 찾다가, 내가 아는 작가가, 새롭게 전시를 하는구나. " 아 이번엔 해외에서 하는군....."하면서 추임새를 스스로 넣으며 그 힘을 빌어 전화를 걸고, 목소리를 듣는 거지요.

 

 

권경엽 <고요한 섬>

Calming Island 291X162cm oil on canvas 2008

 

무통분만의 세대, 베르트 뮐러의 <숨그네>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힘든 숨을 내쉬는 것, 그 자체가 마치 하늘 아래 걸려 있는 그네처럼 나부끼는 상태. 권경엽의 그림을 보던 날은, 오늘처럼 봄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쌀쌀함이 대기 속을 헤매던 겨울 어느날이었나요. 작가의 변처럼, 자신의 그림은 죽음과 에로스의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지요. 저는 그림 속 여인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고왔고, 누군가 하얗게 표백된 붕대를 내 머리에 감싸, 아픈 기억들을 잊게 해주길 바라던 날들의 연속선을 거닐 때라,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권경엽

Last letter 116.8X91cm oil on canvas 2010

 

요즘은 유독 손 편지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이메일을 주고 받는 세대여서 일까요. 데이터의 처리속도와 질은 광속으로 변모하는 시대이건만, 나지막한 손의 떨림으로 한 자 한자 꾸욱 꾸욱 눌러쓰다, 오른 손 엄지 손가락 아래, 두툼한 살 부분에 경련이 나기도 하죠. 그래도 편지를 쓴다는 건, 참 로맨틱한 행위같습니다.

 

권경엽의 <마지막 편지>란 작품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내 몸뚱아리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건 언제였던가 하고요. 최근 2주동안 지속된 다이어트로 인해 몸이 다소 가벼워졌지만, 봄 기운을 견디기엔 여전히 무거운 몸. 다이어트란 것이 '신체감량'이 아닌 몸과 영혼을 화해시키는 일이어야 함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지만, 일상의 찌든 때를 세탁한 후, 봄 햇살에 말리기엔, 여전히 표백이 덜 된, 내면의 상처들을 내 몸이 기억하고 담고 있기에.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그녀의 영혼에 인주빛 문신을 세기는 일이라고 시인 문정희는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 붉은 문신이 하얗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영어의 표백을 의미하는 Bleach에는 '위반과 금기'란 뜻도 있습니다. 그만큼 내 안으로 난 길을 걷기 위해, '규정된 법'의 길을 벗어나야만 오히려 상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알게 된 거죠. 모든 이야기는 길에서 시작되고 길에서 마무리 되니까요.

 

원고를 넘기고, 아픈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고, 돌아오는 길 대학시절 습작 연습하며 읽던 시인 오규원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모든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잎이나 꽃의 힘에만 있지 않다.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막막한 허공에 길을 열고 그곳에서 꽃을 키우고 잎을 견디는 빛나지 않는 줄기와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깜깜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숨어서 일하는 혈관과 뼈를 보라. 우리의 새로움은 거기에서 나온다"

 

오규원의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중에서

 

글을 쓰는 요즘, 교착상태에 빠져 있음을 배웁니다. 너무 써댄 탓이기도 하고 지쳐있기도 합니다. 여행이라도 갈 요량으로 어떻게든 휴가를 빼보려고 했는데. 이도 글렀습니다. 며칠 전 경인방송 OBS에서 봄맞이 개편과 더불어 새롭게 편성된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나가라는 부탁을, '강단있게' 거절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나마 월요병을 앓는 한주의 시작을 넘어, 겨우 숨을 돌리는 화요일 조차도 쉴 여유가 없어지는군요. 글을 쓰면서 두렵습니다. 예전같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건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이 목적, 이 꿈 하나로 버텨왔던 공간이 어느 날 산산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글을 쓰는 이는, 항상 자신의 글의 호흡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 여유를 얻기 위해 '인식정지'와 '손동작 중지'도 과감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끙끙 거리고 있네요.

 

그림 속 눈망울처럼, 어딘가를 분노에 차서 바라보는 일이 잦은 요즘입니다. 개그맨 김재동님의 하버드 특강관련 글을 읽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정부를 가진 적은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조국을 가진 적은 없다"면서 "나는 오로지 웃기고 싶을 뿐"이라며 에둘러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에 숙연함이 서립니다. 요즘 현실이 참 암울합니다. 수많은 무명의 군인들이 수장되고, 지도층이란 자들은 스폰서와 성상납으로 자신의 배와 욕망을 채우고, 그 와중에도 정치인들은 자신만이 대안이라 합니다. 솔직히 다 싫습니다. 구역질 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환멸감에 빠져, 의무를 잊자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진 마세요.

 

권경엽 <잃어버린 것>

Lost 116.8X80cm oil on canvas 2009

   

다만 그의 말의 이면 속,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민주의 가치란 이렇게도 손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이구나 라는 걸. 저는 현 정권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아니, 인주빛 문신을 몸과 머리에 새기고 있는 거겠죠.

 

행여 이렇게 글을 썼다고 좌파 소리를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안이 없는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문화부 장관이란 자는 공연에 와서 잡담을 늘어놓아 공연을 보는 것 부터 불쾌하게 만드는 세상. 그래놓고 비평하는 이들을 가리켜 웃기지도 않는 '색깔'을 입혀내려 혈안입니다. 색에 대해서는 제가 그들보다는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반응할 뿐더러, 잘 이해하고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호수위를 흐르는 느린 시간의 상념들, 진초록 빛깔의 풀밭위에 유유히 앉아있는 귀족들의 옷차림, 둔부가 탐스럽게 강조된 버슬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 당시 모든 패셔니스타의 머스트 해브로, 가져야 했던 백색 파라솔은, 그랑자트 섬의 강렬한 오후 햇살을 가리며, 여인들의 피부를 더욱 하얗게 표백합니다.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랑자트 섬의 오후>로 시작하는 매 강의. 저는 이 그림을 통해, 근대의 패션이, 유행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였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재봉틀의 발명, 인공염색의 발전, 유통과 백화점의 등장, 쇼핑하는 인간들의 아련한 모습들.

 

그렇습니다. 이 그림 한장에는 이렇게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지요. 그러나 자세히 그 이면을 되돌이켜 보면, 잃은 것 또한 많습니다. 환경을 잃었고, 손때가 우는 생의 아우라를 잃었으며, 한벌의 단아함을 입기 위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 고민하는 치열한 시간도 버렸습니다. 아니 잃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 날씨가 참 을씨년스럽네요. 잿빛과 푸름을 번갈아 가며 교차시키는 여우비의 얄미운 행태가 눈에 걸립니다. 그래도 사무실 뒤켠, 작은 둔덕엔 이미 봄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네요. 그대 앞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즐겨야지요. 그나저나 오늘 방송 참 걱정입니다. PD를 만나서 일회로 끝내자고 말을 해야 할지, 계속갈지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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