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상처를 포장하는 법-윤현정의 그림을 묵상하다

패션 큐레이터 2010. 4. 29. 06:30

 

 

윤현정_red bear-holding the flower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0

 

장을 보고 봅니다.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육식이 땡기지(?)않아서

유기농 야채, 약간의 포도 올리브유에 살짝 볶아 밑반찬으로 만드는 미역

매일 하나씩 먹는 브로컬리,딸기와 방울 토마토, 바나나, 씨없는 청포도, 고기대신

단백질 섭취를 위한 두부 4모, 새송이까지, 검정색 비닐 봉투속이 가득찹니다.

 

집에 돌아와선 본격적으로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하죠.

물론 주말을 이용합니다. 어묵조림과 연근 조림, 미역무침 등

문제는 장을 보고 나서 쌓이는 이 비닐 봉지들일 것입니다. 친환경을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마트건 재래시장이건 이 비닐 봉지란

먹거리를 담아내는 포장지를 처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갖 스티로폼까지.

 

 

윤현정_ivory bear-holding a tomato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0

 

비닐은 참 편이한 매개이긴 합니다.

무언가를 밀봉하고, 오랜동안 습기나 윤택을 잃지 않고

장 봐온 야채들을 보관할 때, 랩이란걸 또 씌워서 보관을 하죠.

비닐은 먹거리가 입는 일종의 보호막이자, 외부로부터 먹을 것들을 지켜주는

일종의 의복입니다. 작가 윤현정은 바로 비닐의 이런 상징성에 주목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 아구리를 빼꼼히 열어, 검정 비닐 봉투 속 담은 생물 이면수가 죽지 않도록 해도, 결국 한 시간도

못되어 비닐 속 어둠 속에서 죽어가죠. 인간의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의 일부이자 그 세상의

은유로서, 비닐을 사용하는 작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여 부패할 수 있는 것들을

막고 공기를 차단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비닐의 희망론을 펼칩니다.

 

 

윤현정_spider jewelry #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우리는 흔히 보관을 위해 밀봉이란 과정을 거칩니다.

사람을 만나는 과정도 이것이 필요하죠. 서로의 비밀을 일정 부분

털어놓고 이것을 공통이 지켜야 할 '유대의 끈'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밀봉하고 입을 다물지요.

 

 

윤현정_sea horse-jewelry #2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생선을 담은 검정 봉투 속 암흑처럼, 우리네 세상도 비닐

봉지 속 세상보다 더 어두우면 어둡지, 결코 밝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비닐이란 포장재에 부여하는 것은 어둠 보다는 밝음의 속성입니다.

관계가 썩지 않고, 후패하지 않으며, 밀봉 속에 더욱 오랜 시간을 견뎌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얼음 찬 겨울에도 싱싱한 푸성귀를 먹을 수 있는 것, 혹은 싱싱하게 물오른

붉은 색 장미를 선물로 살수 있는 건, 오로지 이 비닐로 지은 집 때문겠죠.

 

 

윤현정_rose & water drops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0

 

작가는 투명한 비닐처럼

우리를 둘러싼 관계의 견고함을 결정하는 건

밀봉한 매체가 아니라, 밀봉상태의 투명성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윤현정_strawberry_1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0

 

윤현정의 그림, 투명하게 밀봉된 비닐 속 딸기가

탐스럽긴 합니다. 물론 주변의 공기가 차단되어 있기에

보호받는 느낌이 드는 건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식의 보호는 거절하고 싶더군요. 때로는 알레그로로 흐르는 바람과

햇살의 조율 속에, 관계들을 말려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 만의 생각일까요?

 

 

윤현정_strawberry_2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0

 

요즘처럼 글을 쓰면서 계절에 대한 소감이나

느낌을 적기가 어려운 적도 없지 싶습니다. 연두빛 봄을 이야기

하면 언제그랬냐는 듯, 겨울기운이 창 밖을 때리고, 소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리고, 이제부터는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칼 같은 변화는 더욱 둥그런

미모사의 형상을 띨 것이라고. 그렇게 유연하게 맞이하는 시간을 즐기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렇게 장단을 맞추기 어려운 계절. 출근길은

더욱 아리고 화가 나는 것을......

 

봄이 오는 것을 막는 이 힘은 무엇일까요?

그림 속 비닐을 이용해,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 모두 거둬 내

그 속에 담아 버무려 버리고 싶은 하루입니다. 행복한 한주 마무리 하세요.

어제 늦게 발레 코펠리아를 봤고, 오늘은 <비언소>란 연극을 보러 갑니다. 한달이

20편이 넘는 공연을 보러가는 것으로 다 채워지네요. 좀 지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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