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인간이 동물을 다룰 권리-패트리샤 피치니니 전시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0. 4. 11. 08:30

 

 

 

패트리샤 피치니니 <아이자세>

인모 옷, 실리콘 파이버 글라스, 갱거루, 러그, 2009 

  

월간미술 4월호에 글을 기고한 후, 이번 호의 내용을 훓어보고 있었다. 매거진 표지를 장식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특별 취재나 기사들이 대부분인데, 이번호 표지 사진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호주 작가 패트리샤 피치니니. 그녀의 작업에 대해 깊게 알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이 전시가 열리고 있는 대구의 이안 갤러리에 연락을 취해 보도자료와 작품 이미지를 받았다. 이미지 한장 한장을 면밀히 살펴봤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우리는 가족>를 만들었던 작가였다. 그때 인간에게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창조된 생명체를 은유적으로 만든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인전을 통해 보게 된 것이다.

 

<물보다 진한> 파이버글라스, 자동차용 도료

76*45*58cm 2007

 

바야흐로 인간 복제기술의 상용화 문제를 놓고 종교와 과학담론이 충돌하는 시대다. 로봇이 인간의 일상에 개입, 도우미로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나씩 대신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상의 육체노동을 벗어나, 구상노동까지 할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신 생각하며 창작까지 가능한 그런 사회 말이다. 직장에 출근하기 싫은 게으른 세일즈맨에겐 이 보다 멋진 구원의 소리가 어디 있겠냐만, 생각해보면 생각하는 인간, 혹은 타인에 대해 윤리적 배려를 베풀수 있는 인간의 면모를, 로봇이 대신한다는 건 꽤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는 가족>을 떠올려 보니 몇달 전 보았던 <마이 시스터스 키퍼>란 영화가 기억났다. 주인공 안나는 언니 케이트의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태어난 맞춤형 아기로 나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대혈, 백혈구, 줄기세포, 골수, 자신의 몸의 모든 것을 언니에게 주었던 그녀. 어느날 안나는 변호사를 찾아가 자신의 몸의 권리를 찾겠다며 부모를 고소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기란 오늘 글의 범위를 벗어나니 이쯤에서 정리하자. 중요한 것은 이 영화는 <맞춤아기>란 현대의학의 논란점을 다룬다는 점이다. 희귀질환이나 암을 갖고 태어난 자녀를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선별에 의한 정상적 배아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란 뜻인데, 유전자 조작의 문제에 쉽게 노출된다는 점에서, 생명을 다루는 영역의 문제이기에 윤리학계의 관심사가 되어왔다. 패트리샤 피치니니 또한 오랜동안 병상에서 시간을 보낸 엄마를 보며 살아야 했다. 유전자조작이나 치료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입장을 표명하기엔 그녀의 개인적 삶은 기술의 발전을 오히려 바라고 소망했던 쪽이다. 동물의 모습을 한 스쿠터 <물보다 진한>을 보자. 그냥 일견에는 귀여운 아이콘 정도로 해석될 만한 것이지만, 기계가 동물처럼 행동하고, 그 중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사회. 바로 기계와 인간, 동물이 함께 병존하며 진화하는 기술적 공진화 사회의 단면이다.  

  

패트리샤 피치니니 <Not Quite A Animal>

  

패트리샤 피치니니는 호주를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작가이며 자연과 인공물의 조화를 생각하며 작업한다. 아방가르드가 뭔가? 말 그대로 전위부대를 말한다. 시대의 감성적인 성감대, 가장 예민한 상처를 먼저 바라보고 사유하기 위해 '인식의 전장터'에서 척후병이 된 이들. 그들을 가리켜 우리는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왔다.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까지, 다른이들보다 먼저, '생각꺼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그녀는 아방가르드다. 패트리샤 피치니니는 인간과 동물의 하이브리드, 진화, 돌연변이, 유전공학, 환경오염의 테마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녀의 집요함 뒤에는 의외의 '쿨'함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술발전에 의한 인간과 다른 종 간의 관계를 윤리적인 입장에서 단죄하기 보다는 서늘한 시선을 가지고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유독 기괴한 느낌이 드는 '자연과 인공의 합성물'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인간의 희귀질환을 위해, 유전자 조작된 돼지나 쥐를 양산하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는 맑은 동물의 눈을 보며, 각각의 생명체들이 우리와 동질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자문한다. 우리에게 과연 동물을 다룰 권리는 어디까지일까? 라고. 인간을 위해,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동물이나, 기계또한 사회화의 과정을 겪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을 모방하고 그 방식을 배우며 살아간다. 인공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만나는 지점이다. 이제 질문을 던질때다. 우리에게 과연 이들을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라고. 작가의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는 현재, 뛰어난 유전자 복제 기술을 이용,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리모'를 통해 종의 죽음을 막으려는 노력과 캠페인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도 지리산 '반달곰' 재생 프로젝트에 들어가지 않았나. 문제는 이런 해결방식은 인간이 저지른 환경파괴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 쉽다는 점일거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 살아숨쉬는 것들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책임져야 할 인간의 윤리, 에티카를 생각하기 보다, 기술발전에 의한 '땜방'식 대증요법이 되기 쉽다는 말이다. 좀더 근본적 성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수 있다는 점.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생각해본다.

  

 

그녀의 작품을 천천히 응시하다 보면, 은근히 따스함이 발산하는 걸 느낄 수 있다. 모성애를 통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균형과 복원을 꿈꾸는 작업이기에, 사실 그녀와 동질적인 스타일의 작업을 하는 다른 작가들, 가령 론 뮤엑이나 듀언 핸슨의 작업과는 또 다른 느낌을 부여한다. 기술은 어떻게 인간사회에 개입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을까? 쉬운 문제는 아닐거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고 치열한 담론의 투쟁이 벌어지는 지점이기에.

 

 

서양의 선진국들은 '댐과 보'를 허물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중이란 기사를 읽었다. 자연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며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 하는 것임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다. 아쉽게도 자연에 대한 '관점'이 가장 엉망으로 흐트러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물의 흐름을 막기 위해 보를 설치하고 임기 내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콘트리트를 이용, 강물의 속살을 찟어놓는다. 자연은 한번 무너지면 복원되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데다, 설령 인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복원된다해도 그 원형을 담보할 수 없기에, 4대강에 대한 국민적 감성은 이미 절대적인 반대표에 서 있다. 치수사업이라며, 깨끗한 물을 먹기 위해, 물을 가둔다는 어설픈 논리가 과연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까?

 

  

 

총리 스스로 4대강 사업을 거대한 '어항'에 비유했다. 자신 스스로가 고백한 셈이다. 어항의 물은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썩기 마련이다. 한국은 자연과의 공존 대신, 폭력에 의한 지배, 자연의 식민화를 선택한 셈이다. 생의 물꼬를 트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기득권층의 삶은,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맞춰져 있고, 이를 위해 다른 종도 아닌, 경제적 하위계층 전체가 그 피해를 입는 형국이다. 왜 우리는 잠잠해야 하는가? 종교계의 외침도, 수많은 과학자들의 양심선언도, 토건족 정권의 욕망을 막기엔 미약하다. 귀를 막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잔을 채우는 자들이여. 신의 분노가 곧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까?

 

1972년 독일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가 떠오른다. 전설의 황금도시 엘 도라도를 찾아 나선 스페인 군대, 아마존의 거센 소용돌이와 인디언의 공격으로 탐험은 난국에 봉착하지만, 황금과 권력에 눈이 먼 아귀레는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부대를 지휘,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다. 점점 더 거세지는 물결 속에서 겨우 뗏목 하나에 의지 버텨가지만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자신의 딸마저 잃게 되자, 하늘을 향해 '신의 분노'를 샀다며 절규한다. 4대강 사업은 물을 황금으로 대치시킨 현대판 엘 도라도 사업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과 인간의 조화, 관계 모두를 파괴해서라도, 건설족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사업일 뿐이다. 이제 그 끝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청지기로서의 윤리, 자연을 보호하고 생육시켜야 할 의무를 저버린 지도자의 끝은 암울할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한때 반짝하던 권력도 금새 저 자연의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리니, 신의 분노가 그들 앞에 있을지어다. 그것이 엄정한 자연의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