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미국의 패션출판산업이 부러운 이유-조프리 빈의 도록을 읽다가

패션 큐레이터 2010. 3. 13. 06:30

 

 

 

요즘들어 패션 디자이너들의 도록을 자주 산다. 일명 By 시리즈란 것인데, 오늘 산 것은 Beene By Beene이란 책이다 미국의 방돔 출판사에서 나왔다. BY시리즈는 각 디자이너 별로 그들의 작업이력과 작품 면면에 드러난 경향들, 무엇보다도 디자이너의 일생을 통해 이뤄낸 작품미학을 면밀하게 추적하는 책이다. 내가 가장 써보고 싶은 종류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상봉 선생님의 작품 전체 도록을 만들고 싶다. 물론 만들자는 출판사도 있고, 선생님도 응낙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선뜻 쉽지 않은 것이, 책 안에 담길 내용의 충실성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면 위인전 한권 쓰고 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삶은 일반 평전과는 좀 다를 방식의 서술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마냥 미술작가들의 카탈로그 레조네처럼 연도별로 작품들을 정리하고 경향을 요약하는 것도 썩 맞지 않다.

 

     

 

작가의 삶과 작품 전체를 아우르며, 귀납적인 글쓰기를 통해, 작가로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미학을 밝혀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단순하게 몇 시간, 몇 차례, 심도깊은 인터뷰를 했다고 이런 책이 나오는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툭하면 왠만한 책이 다 나와있다고 큰 소리 치지만 제대로 찾아보면 없는 책이 참 많은 나라다. 맨날 목소리만 높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생각해보라 맨날 서점에는 경영/경제, 자기개발 코너만 불이튄다. 붕어빵처럼 찍어낸 '딱 일주일치의 약빨만 먹히는" 책이 난무한다. 디자이너 평전에 관한 이야기는 저번에도 한번 썼지만 오늘은 작정을 하고 정리를 해야겠다.

 

서점의 의상학 코너를 한번 가보면, 이 땅의 90년이 넘는 패션교육의 실제 모습이 드러난다. 대부분 외국서적을 번역한 패션상품기획이나 리테일링 분야, 여전히 두 세권 밖에 없는 서양복식사, 한국 복식사는 대중을 겨냥한 그 어떤 책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물론 한문이 가득한 내용이란 걸 모르진 않지만, 좀더 현대적인 느낌으로 한국복식사도 판형을 정리하고 내용을 서술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맨날 재단과 봉제, 소재 기획 몇 권, 그리고 오래도록 내용이 증보되지 않는 복식사회심리학 분야, 등등이다. 패션이란 분과 자체가 다학문적이고, 학제간적 접근이 많다보니, 한줄에 정리하기 어렵고, 그만큼 한 권의 책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의상학 교재는 절망의 수준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패션이란 오브제를, 면밀하게 읽어갈 수 있도록 훈련하는 방법론 책이나, 시지각과 패션 언어를 정교하게 익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은 거의 전무하다.  

 

무엇보다 한국 디자이너 명장들의 자료 정리도 시급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패션협회부터 시작해서, 중견 디자이너 그룹과 신인 디자이너 그룹, 노장 그룹의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는 것 모르는 바 아니다. 왜 디자이너들이 그렇게 책에 '선정되는 문제'에 예민할까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닌 것이, 디자이너론 책 자체가 거의 전무하고, 시리즈물로 묶여 나오는 편집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국가의 개입아래, 파리 패션에 전략적으로 안착한 일본 디자이너에 비해, 한국은 각개 전투능력을 배가시켜 지금껏 한국적 쉬크의 매력을 알렸다. 그만큼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 영문과 국문이 혼용된 자료들, 혹은 단행본 시리즈는 큰 무기가 된다. 그 자체로 마케팅을 위한 수단이 된다. 문제는 이런 자료와 책이 가뭄에 콩 나듯 하니, 어렵게 시장을 뚫은 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등재되고 싶겠나. 그러니 패션 전시 하나를 하려해도, 기획전을 하려해도, 인터뷰 집을 하나 쓰려고 해도, 의견이 분분하다. 뭐 제대로 통일 되는 걸 본 적도 없고, 서로들 왜 그렇게 사이가 안좋으신지, 제 3자로 한국의 패션산업을 위해 기도하는 나로서는 참 답답하다.

 

디자이너들의 성과를 데이터 화 해서 책으로 잘 엮어내고, 지금 당장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 비해 미흡해도 우리 내 자생적인 디자인을 하려는 이들을 찾아내고 격려하는 것. 이런 과정이 얼마나 필요했던가. 미국은 정말이지 이런 작업을 잘 한다. 이번 조프리 빈 도록을 보면서 느낀 점이다.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모든 분과의 역사가 짧은 미국이, 학문적 / 문화적 성과에서 그들에게 기죽지 않는 것은, 짧은 역사 속에 드러난 예술가들을 '문화적/국가적' 아이콘으로 승격, 대우해줬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자. 일제강점에 의한 침탈의 역사를 넘어 근대화와 오늘날의 이르기까지, 의외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유구한 5천년의 복식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패션의 근대사를 문화적으로 풀어내는 일엔 도통,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국문학자들이 191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한국의 근대화와 패션을 함께 묶어 쓴 단행본은 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단행본들을 자주 내고, 디자이너들을 재발견 한다면, 좁은 땅 덩어리에서 싸우듯, 그렇게 영토의 문제로, 등재의 문제로, 인정의 문제로 얼굴 붉히는 횟수가 확연하게 줄지 않을까?

 

퇴근 후 하루에도 6-7시간 이상을 저술에 몸을 바치고 있는 지금에도,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희망은 버릴 생각이 없다. 1500페이지 정도의 세계복식사 통사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기껏해야 300페이지 남짓의 복식사 책으로는 의상디자인을 하는 이들에게, 전혀 영감을 줄 수 없다.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넘어 인상주의 시대,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의 복식사를 꼼꼼하게 5권의 책으로 묶으려 한다. 숨겨진 이야기들을 복원하고 옷에 담긴 은유와 의미들을 집대성 하는 일이다. 그래야 패션 디자인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상상력을 줄수 있다. 결국 모든 건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디자이너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와 혼합시켜 자신의 옷에 투사시킬 수 있도록, 역사를 재구성하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컬렉션을 만들고, 라인을 만들 수 있다. 결국 패션은 환상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현재로서의 과거다. 시대는 언제나 재해석과 구성을 기다리는 오브제와 같다.

 

이 정리가 끝나면 반드시 한국의 근대패션사를 정리해볼 생각이다. 한국에선 패션 라이터는 정말이지 '블루오션'이긴  한데, 너무 외롭고 돈도 안되고, 그저 책임감 하나로, 옷에 대한 사랑 하나로 버텨야 하는 존재인듯 싶다. 인세로 무슨 돈을 만질 생각보단, 방대한 자료를 사 모으는데 매달 월급을 다 쏟아부어야 하니.그래서 참 많이 힘들고 외롭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