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패션 사진의 의미를 묻다
이번 한예종 자유예술캠프에서 강의하면서 3주 차에 패션 사진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어빙 펜에서 스티븐 마이젤까지, 패션사진의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간략한 약사와 더불어 그들의 작품 경향을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학생들에게 미안했던 것은 너무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알려주려고 하다 보니, 깊이감을 잃어버린 느낌이 없지 않아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패션사진의 역사만 6강으로 나누어서 설명해보고 싶다. 특히 사진 작가 리 밀러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넘어갔던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녀의 작품 사진집을 최근에야 구매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리 밀러. 1907년 4월 23일 뉴욕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계였고 어머니는 아일랜드 부모아래 자란 캐네디언이었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테오도어는 자신의 딸을 총애했고 항상 사진 모델로 등장시키곤 했다. 자신의 꼬맹이들을 누드 사진의 주인공으로 삼았고, 딸에게 사진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가 19살이 되던 해, 보그지의 창립자였떤 콘데 나스트는 그녀를 맨해튼 거리에서 발견하고, 오늘날의 '길거리 캐스팅'을 했다. 그렇게 1927년 보그지 표지 모델로 등장한다.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가장 인기있는 모델로 성장한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그녀없이는 패션 사진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당시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던 탐폰 광고에 그녀의 얼굴이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맘 고생을 톡톡히 해야 했다고.
1929년 그녀는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당시 만레이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의 교우 때문이었다. 밀러는 만 레이의 사진 조수가 되었고 이후 그의 연인이자 상상력을 불어넣는 뮤즈가 되었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본인 스스로 스튜디오를 차리고 사진작업에 몰두했다. 만 레이가 회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패션 사진 작업을 자신이 맡아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초현실주의 예술사조에 흠뻑 빠져 있던 그는 피카소와 폴 엘뤼아르, 장 콕토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었다. 장 콕토의 '시인의 피'에 등장인물로 출연하기도 했다.
리 밀러란 존재 자체가 1930년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의 이미지다. 패션은 항상 시대가 매체의 힘을 빌어 규정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내고, 여기에 맞는 옷을 만들어 낸다. 난 아직도 도록 속 그녀의 자화상 사진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너무나 정갈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멋이 풍긴다. 강한 빛의 대조 속에서 얕은 골지무늬 쇼파위에 앉아 옆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황홀하리 만치 아름답다.
그녀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할 때, 영국에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라는 친구와 가족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보그>지를 위해 종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세인트 말로 포격에 사용된 세계 최초의 네이팜탄을 찍었던 것도 그녀였다. 이후 파리의 해방과 알사스 전투, 나치의 강제수용소등을 생생하게 촬영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포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비엔나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사진에 담았다. 포토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은 최근들어 새롭게 조명을 얻고 있다.
하지만 종군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상흔은, 그녀의 영혼에 큰 상처를 남긴다. 이후 오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고, 안타까운 결혼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항상 당당하게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찍곤 했다. 당시 사진 속 여성들의 옷차림이 볼 만하다. 1930년대에서 50년대 초반에 이르는 패션의 경향을 살펴보기에 좋다. 무엇보다도 초현실주의 작업을 통해 선 보인, 몽환적인 패션 이미지는 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모델이 되어 찍은 초상사진에 눈길이 간다. 리 밀러의 사진집을 구해 보는 시간, 그녀가 찍었던 뉴욕의 여인들과 옷 차림 속에 베어나는 사연들이 궁금해졌다.
요즘은 자료 사모으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언젠가 꼭 멋진 패션 아카이브를 만들어 공개할 것이다. 시대를 읽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10년 단위로 끊어서 각 시대의 문학작품과 패션, 사진작품, 다양한 예술양식, 민속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미시적인 삶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공부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과학화된 사료와 실증자료가 아니라, 그 시대의 면모를 토대로 상상해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배운다.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지만, 난 이런 시도가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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