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빛으로 그린 그림

자연의 흐름을 깨뜨리는 자-죽음을 맞게 되리라

패션 큐레이터 2010. 3. 13. 07:00

 

 

권오열_낯선숲-0912_디지털 C 프린트_76.8×76.8cm_2009

자연이란 단어를 잘 살펴보라.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현재의 상태를 빚어온 거대한 조형의 힘을 배우게 되리라. 결국 인위적이냐 혹은 자연적이냐의 차이는, 작품의 최종적 숨결이 인간에 의한 것인지, 인간을 잉태하는 또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권오열_낯선숲-0818_디지털 C 프린트_124.8×124.8cm_2008

자연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동양과 서양이 표상하는 단어의 뜻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동양의 자연은 정신적 푸근함과 넉넉함을 느낄수 있지만 서양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서양의 자연주의는 인간의 행동과 심리가 객관적으로 검증되고 묘사되어야 함을 말할 뿐이다. 즉 자연은 적자생존의 살벌하고 무자비한 생존법칙을 자행하는 잔혹한 자연일 뿐이다. 당장 일본의 하이쿠 작가인 바쇼의 작품과 영국의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비교해보면 쉽게 드러난다.

 

바쇼의 하이쿠를 보자 "자세히 보니 냉이꽃 피었구나 생울타리 옆" 한줄의 여운을 느껴보라. 이제 테니슨의 시를 소개한다. 그의 시 중에서 <담장 틈바귀에 핀 한 송이 꽃>이란 작품이다.『담장 틈바귀에 핀 한 송이 꽃 나 너를 틈바귀에서 뽑아 여기 쥐고 있다. 내 손에 뿌리째 모두 조그마한 꽃-하지만 만약 내가 알 수만 있다면 네가 무엇인지, 뿌리째 모두, 속속들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이 두 시의 차이점은 뭘까? 아주 작은 차이가 감지될 거다. 바로 전자는 그대로 꽃을 살펴본다는 점에 있고, 후자는 자신의 질문을 엄정하게 파고들기 위해 꽃을 꺽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뿌리가 뽑힌 꽃은 말라 죽는다. 자신의 질문에 집착한 나머지, 꽃의 운명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서양의 자연주의란 관점이다.

권오열_어느8월-0702_디지털 C 프린트_76.8×76.8cm_2007

사진작가 권오열의 <낯선 숲> 전시를 살펴보는 출발점은 자연에 대한 개념정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작가 권오열은 사진계에서 철저하리만치 객관적이고 냉정한 미니멀리스트란 평가를 얻고 있다. 너무나 차가울 정도로, 담담한 시선으로, 자기의 의지와 감성을 배제한 채, 있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카메라란 광학적 장치를 이용한 자연의 묘사는 과학적인 접근법을 기초로 하지만, 결국 그 배후에는 정교하게 묘사된 자연의 질서를 살펴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숨쉰다. 숲 전체를 보여주기 보다, 부분을 철저하게 물고 늘어져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답에 도달한다. 그런점에서 그는 자연주의자다. 캔버스 전면을 물감으로 가득 채웠던 올 오버 페인팅처럼 그의 사진은 꽃과 숲의 일부, 나뭇잎, 풀잎의 세밀한 속살을 현미경처럼 찍는다. 화면은 여유없이 가득차 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그리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금 카메라의 눈에 포착된 자연을 찍었을 뿐인데, 답답함 대신, 왠지 묘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질서감이 화면에 가득하다.

권오열_낯선숲-0804_디지털 C 프린트_124.8×124.8cm_2008

작가 권오열은 사진언어의 문법을 철저하게 지킨다. 장르가 표현할 수 있는 내적질서에 천착한다. 그는 흐린 날씨를 골라 촬영함으로써 반사광을 피하는 촬영조건을 지킨다. 빛의 산란은 화면 전체가 은은하게 점증되는 느낌을 깨뜨리기 때문이란다. 여기에 바람이 없는 날을 골라야 한다. 피사체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서란다. 정말이지 완벽주의자의 면모가 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왜 다양한 기상 조건 하에, 부대끼는 자연의 넉넉한 무늬를 그려내지 않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 자연은 바로 사회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면이라기 보다는 근간을 이루는 조직이다. 근본에 가해지는 미세한 균열은 사회 전체를 붕괴시키듯, 그는 자연을 그렇게 성스러운 초심의 대상으로 찍는다. 사회가 그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 질서를 통해 조화와 상생을 이루듯, 자연 속에 내재된 철저한 질서감을 통해, 사회 속 견고하게 유지하는 '구심력'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권오열_낯선숲-0702_디지털 C 프린트_76.8×76.8cm_2007

자연은 그 안에 사회를 향한 질서의 문법을 담는다. 자연의 순환 속엔 인간이 만든 세상의 질서가 들어있다. 그 자연을 깨뜨리는 자, 임의로 자신의 욕망을 불어넣는자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강물은 막힘없이 흘러야 하고, 끊임없는 유동의 상태에서, 마르고 상처난 인간의 마을을 감싸안는다. 인간의 숲에서 소통이란 강물이 흘러야 하듯, 자연의 숲 또한 그런 것이다. 서양의 자연을 의미하는 Nature는 Natura라는 라틴어원에서 왔다. 이것은 이미 '만들다'란 뜻을 담고 있다. 인위적으로 빚는다는 것이다. 동양적 자연친화나 내적 통일성은 찾아볼래야 볼 수 없다. 결국 나 자신의 욕망과 배를 채우기 위해, 자연은 내 욕망의 시선 안에 담기고 새롭게 빚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지금 우리라는 비인칭의 숲 사이를 흐르는 강을 막는 자들. 그들은 자연의 동양적 관점 보단, 서양적 관점의 파괴적 자연을 숭상하는 자들이다. 꽃 한송이를 연구하기 위해 꽃을 통째로 뽑는 자들, 뿌리를 뽑는 자들. 한 송이의 꽃이 뽑히는 순간, 자연이란 거대한 질서의 벽에 미세한 균열이 간다는 걸 모르는 거다. 균열이 누적되면 자연 스스로 붕괴된다. 그 안에 담긴 인간사회도 붕괴될 수 밖에 없다. 4대강 사업의 진행여부를 둘러싸고 법원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국토해양부장관과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했다. 그들은 신청기각의 이유로, 지금 당장 그 효과의 역성을 살펴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맞는 말이다. 그들에겐 작은 균열일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 균열 사이로 내적 질서의 세계가 깨지는 날, 우리는 죽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법원의 판결이 매우 유감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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