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사람들이 쇼핑을 하는 이유

패션 큐레이터 2010. 2. 22. 00:15

 

 

이정아_situation(people)_캔버스에 유채_120×240cm_2009

쇼핑을 위해 백화점에 갔습니다.

미만한 봄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는 시내를 걷습니다.

백화점 정면 파사드엔 펄럭이는 두 개의 깃발이 2열 종대로 서서

우리를 부릅니다. 그 깃발엔 '살래(sale)'라고 쓰여 있네요.

그렇습니다. 백화점은 사야하는 곳이죠.

 

하지만 사야하는 행위를 강제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도 않습니다. 백화점은 그저 화려한

인테리어 속, 수많은 명품들을 나열하며 소비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숙시키는 방식이라는 교묘한 수사를 펼칠 뿐입니다.

 

 

이정아_situation(female)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9

 

작가 이정아는 관찰력이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녀는

'기차를 타라'는 외국 가수의 노래를 패러디하여 이번 전시의 부제로 삼았습니다.

기차를 탄 다는 것은 최종 목적지가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의 대열 속에 낀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삼은 것이죠. 그녀는 군중들의 발걸음,

그 형태와 보폭의 깊이를 통해, 집단의 걸음걸이에 박혀있는

일종의 정신적 패턴을 선보이려는 듯 합니다.

 

작품 [situation-female]은 관찰한 여성 쇼핑객 세 명을 그렸습니다.

마치 상자안에 담긴 상품들처럼 화면 가운데 배치되어 있네요. 자세히보면

굳이 드러나진 않지만 명품 브랜드 가방을 매고 있습니다. 비슷한 옷차림과 액세서리

옷을 입은 몸선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그려지지요.

그녀들은 서로를 부지불식간에 눈 스캔을 했을 터이고 서로가

소유하고 있는 브랜드를 살펴보고 있을 겁니다.

 

이정아_situation(talk)_캔버스에 유채_120×240cm_2009

 

백화점 한켠에서 쉬고 있는 남자들을 그린 작품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쇼핑을 위해 백화점으로 끌려간 남자들의 뒷 모습은 왠지

동질적이면서도 애처롭지요. 쇼핑이란 행위를 적극적으로 즐기지 못하는 중장년의

모습이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1850년대 백화점이란 형식의 쇼핑장소가 지상에 등장한

이유로, 상류계층도 아닌, 맨손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 집단도 아닌, 중류계층에게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이정아_situation(walk#3)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09

이정아의 그림을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내기엔

그림 속 화면 자체는 투명할 정도로 가볍습니다. 그저 사람들을 묵묵하게

응시하고 이를 그려낼 뿐이죠. 상황속에 놓여진 인간의 신체 언어와 사회적 배경과의

관계에 집중하기에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극적 요소'도

알알히 박혀 있습니다.

 

최근 사회심리학과 경영이론을 결합한 새로운

소비자 행동의 이론틀을 발표한 마크 얼스가 쓴 허드(HERD)를 읽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비자행동을 전공한 탓에 관련된 심리적 내용이나 구매에

끌리게 되는 사회적 맥락과 배경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요. 이 책에는 개성을 추구한다면서,

결국 유행을 좇는 기묘한 군중심리의 진면목과 배후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정아_situation(female#1)_캔버스에 유채_100×200cm_2009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의 심리학>은 쇼핑에 나선 집단의 무의식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꽤 좋은 이해의 창을 제공합니다. 그는 개인들의 의식적 행동이

군중의 무의식적 행동으로 대체된다고 보았고, 그 집단이 가진 무의식적 힘의

세기가, 의식적 개인의 힘 보다 월등하다는 걸 설명합니다.

 

유행이란 현상은 더 이상 예전 바로크나 로코코 시대처럼

왕을 정점으로 한 궁중에서 시작되어 아래로 퍼지는 세상이 아니라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간의 정체성 전쟁입니다.

 

이정아_situation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이정아의 그림 속 백화점 속 군상들은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얻기 위해, 물품의

능선을 걸어가는 개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소지하는 상품은 결코

독특하고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같은 핸드백과 같은 패션

같은 액세서리의 코드를 공유하고 자기가 닮고 싶은 패셔니스타의 뒤를 따라, 그의 패션을

모방합니다. 패션은 오래된 놀이의 형태입니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와는

패션을 모방을 통한 인간의 놀이욕구를 채우는 매개라고 주장했죠.

 

차이를 찾아 쇼핑을 하지만 결국은 백화점의 동선을 걸으며

비슷한 것을 소비합니다.'유행'이란 집단적 동일성을 만드는 기제를 통해

타인들과 접촉하고 소통하는 우리들의 초상이 그림 속에 녹아있죠.

 

이정아_situation(femal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차이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차별화의 욕구가 발생한 중세말기 부터, 인간은 항상

남과 다른 자아, 남과 구별된 나를 갖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왔습니다.

쇼핑 또한 영국을 비롯한 산업자본주의 초기, 도시 속에 새로운 계급으로 성장한

중산계급의 사회적 위상을 세우고, 조형하기 위한 삶의 기술이자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비로소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의미의

인간으로 변모해 간 것이겠지요

 

여러분은 왜 쇼핑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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