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패션계의 2인자로 산다는 것은

패션 큐레이터 2010. 2. 7. 04:07

 

 

S#1 Vogue의 2인자,, 그레이스 코딩턴

 

개인적으로 패션 매거진을 광적으로 읽는 편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1983년 부터 읽기 시작한 직수입 일본 패션 잡지 속 세계는 항상 놀라왔다. <논노>나 <마드모아젤>같은 일본 잡지들을 뜻도 모른채 그냥 잡지 속 이미지들에 반해 읽기 일쑤였다.

 

이후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서점엔 월간<멋>이라는 한국산 패션 잡지가 등장했고, 이후 그 잡지를 매일 끼고 살았지 싶다. 장 폴 골티에니 카스텔 바작이니 하는 참 발음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고, 이탈리아와 파리 패션을 소개하는 란을 무슨 성경책 읽듯 읽었다. 모스키노란 디자이너도 그때 알았고 하나에 모리란 일본 디자이너가 발표한 버터플라이 라인의 드레스가 너무 멋져서 학교 수업시간에도 아른거렸다. 이 월간 <멋>지는 당시 지금은 거장의 반열에 선 한국의 1세대 패션 디자이너들을 대거 소개했었다. 설윤형, 오리지널 리, 박항치, 이상봉 등 이들의 작품을 한 눈에 볼수 있는 잡지가 있어서 참 좋았다.

 

이후 패션 보그를 알게 되고 우먼스 웨어 데일리란 패션 정보지도 보고, 그러고 보면 정말 패션 잡지와 정보지들을 지겹게 읽었던 건 사실이다. 그나마 패션이란 세계를 상상하고 좋아했던 청소년 시절, 패션 매거진 만큼 좋은 소스가 어디 있었겠는가.

 

오늘 영화 <셉텝버 이슈>를 봤다. 안나 윈투어가 주연한 패션 다큐멘터리라고만 알고 봤는데, 이 영화를 보다가 정작 다른 한 명의 여자에게 필이 꽂혔다. 바로 그레이스 코딩턴이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엄청난 분이다. 1941년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그녀는 10대에 이미 모델로 패션계에 데뷔했다. 보그지에 나온 쉬크한 사진 속 세계를 동경하던 그녀의 실제 삶은 깡마른 체구에 수녀학교를 다녔다. 17세에 모델 선발대회에 나갔다. 일설에 따르면 친구가 몰래 자신의 사진을 제출했다는데, 이후 영 모델 섹션에서 합격 이후 보그지를 위해 모델로 활동했다.

 

1960년대 흔히 복식사에서는 Swinging Sixties라고 불리는 문화충격의 시기에, 트위기와 진 쉬림턴 같은 최고의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동차 사고로 눈꺼풀이 완전히 날라가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28살이 되던 해 영국 보그지의 편집장이었던 베아트리스 밀러에게 발탁, 주니어 에디터로 활약했다. 1988년 드디어 미국판 보그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안나 윈투어는 편집장으로 승진했다.

 

S#2 보그 제국의 2인자로 살아가는 법 

다큐멘터리를 보면 2007년 9월호 보그를 만들면서 생기는 패션 저널리즘 내부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5만불을 들여 만든 화보 20페이지를 한번에 안나 윈투어의 의견에 따라 날려버린 그녀가 뒤돌아 서며 그녀에게 욕을 내뱉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만큼 치열하고 뜨겁게 매거진을 만드는 이들의 세계를 살펴봤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크레이티브 디렉터로서 패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철학이었다. 트렌드를 해석하고 이를 다른 사진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풀어내는 방식과 시선이 너무나 정확하고 멋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션의 독재자로 불리는 안나 윈투어와 맞짱을 뜰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점도 매력적이다.

 

예산을 줄였다며 카메라를 향해 여유있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독설을 내품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니 꼭 놓치지 말것.

 

사진 속 1960년대 그녀가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작가 패트릭 리치필드의 피사체 속 그녀는 표범무늬 코트에 롱부츠를 하고 반대방향을 바라보는 닥스 훈트와 함께 산책을 한다. 다큐멘터리에선 정말이지 노장의 모습이 그대로 얼굴 속 자글자글한 주름과 함께 나온다. 패션 사진 한컷 한컷을 다루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정교하고 집요하던지. 그런 눈을 가진 에디터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터다.

 

그녀가 파리와 로마에서 작업을 하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주변의 모습과 풍경을 눈에 담는 씬이 다큐멘타리에 나오는데, 어찌나 이 모습이 좋던지. 그녀의 나레이션이 깔린다. "차를 타고갈때 절대로 눈을 감지말라 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담아두라"는 말이 와 닿았다.

 

색채배합과 사진연출, 그리고 그녀가 18년째 안나 윈투어와 일하면서 주무기로 내세우는 <Narrative-Epic-패션 스토리가 녹아있는 사진 촬영방식은 이후 미국판 보그의 주요한 특징>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트렌드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성을 읽어내는 그녀만의 시선이 있다. 세계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쩔쩔 맨다는 안나 윈투어, 하지만 영화 속에서 나는 보그 매거진의 실제적인 미학과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2인자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끌린다. 영화 끝에 안나 윈투어도 그녀가 가진 '옷을 고르는 눈'과 정확한 감성에 대해 극찬한다. 자신은 그저 결단력이 뛰어날 뿐이라며 자신과 그레이스는 공생적 관계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2인자로 살아도 좋으니, 저런 눈을 가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저 패션의 역사를 공부하는 내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