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히틀러가 사랑한 화가, 프란츠 폰 스투크

패션 큐레이터 2010. 1. 7. 00:07

 

  

프란츠 폰 스튜크 <화가의 자화상> 1905년

 

오늘 다룰 작가는 독일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아르누보 운동에 참여 했던 조각가 겸 판화가, 건축가였던 프란즈 폰 스투크다. 독일 미술사에는 역사에 남는 많은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 이 남자를 고른 이유. 정치적인 논평을 위해서다. 그는 후세의 평가를 통해, 독일 파시즘에 예술적 영감을 준 작가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그는 독일 바바리아 지역의 테텐 바이스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드로잉과 커리커쳐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1878년 뮌헨에서의 미술교육을 시작으로 평생동안 그곳에 머물며 작업했다. 1881년 부터 1885년까지 그는 뮌헨 예술대학을 다니며 화가로서의 모든 기술을 습득한다. 그는 초기에는 다양한 독일판 잡지에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종종 생계를 위해 북 디자인과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삽화도 그려야 했을 만큼 삶은 눅진했다. 1889년 뮌헨의 유리궁전에서 그림을 선보였고, <천국의 수호자>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천국의 수호자(좌)     죄(우) 캔버스에 유채, 1893년

 

1892년 그는 뮌헨 분리파를 세우고 그의 첫번째 조각작품인 <운동선수>를 완성한다. 그 이듬해 평단의 극찬과 더불어 화가로서 공식적인 성공의 길을 걷는다. 자신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 <죄>는 1893년 또 한번 시카고 세계 아트 페어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1895년 그는 뮌헨 아카데미의 미술과 교수로 부임,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1897년 그는 미국 출생의 미망인 메리 린트 페인터와 결혼한다. 이후 자신의 레지던시와 스튜디오를 짓고 작업에 임한다. 스투크 빌라라고 불리는 스튜디오는, 작가가 직접 레이아웃에서 실내 장식에 이르는 모든 것들을 디자인 한 것으로 유명한다. 이 때 자신이 디자인한 가구를 다시 한번 1900년 파리 세계 엑스포에 선보여 금메달을 수상한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그는 1905년 드디어 귀족칭호를 얻고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은 그의 숙명이었을까. 당대 모든 미술의 트랜드와 조류에 뒤쳐져 있을 때에도 그는 뮌헨 아카데미의 수석 교수로서 젊은 아티스트들 사이에선 가장 존경받는 화가였다.

 

그의 제자중엔 서양미술사의 거장이 된 이름이 많다. 파울 클레, 한스 푸르만, 바실리 칸딘스키, 요세프 알버스 등 청출어람이란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는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회화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신화에서 빌려온 것이 많다. 유혹적인 이미지의 여성 누드와 남성 조각, 그 중에서도 팜므 파탈의 모습을 띤 여성의 이미지가 많다. 이건 상징주의 회화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이 오랜동안 천착한 주제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스투크는 항상 그림을 그린 후, 그림을 담는 프레임(틀)을 중요하게 여겨, 스스로 패널을 디자인했다고 전해진다. 1928년 작가가 사망한 후, 화가로서의 인기는 철저하게 붕괴되기 시작한다. 신화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구식이란 평을 들어야 했고, 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된 정신적 상처를 안은 세대에겐 '썩 마뜩치 않은 그림'들일 뿐이었다.

  

 

 

루시퍼

 

그러나 19세기 뮌헨의 화가였던 그를 존경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나찌가 권력을 잡은 후, 스투크는 게르만의 정신과 가치관을 적절하게 표현한 화가의 예로 추앙되었다. 히틀러는 <퇴폐미술>이라고 하여 서구의 나약하고 몽환적인 모습, 근대 도시의 풍경을 그린 화가들을 철저하게 처단했다. 인상주의 그림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사그러져갔다. 그가 그린 <죄> <죽어가는 아마존> <루시퍼> 등의 작품은 바로 세계를 죄로 물든 세상에서 구원하는 초인의 모습을 구현했고, 미술을 정치에 사용, 대중을 현혹시키려 했던 나찌 정부에겐 최고의 작가였던 셈이다.

 

 

죽어가는 아마존, 캔버스에 유채, 1902년

 

평생을 여성혐오증으로 살았던 히틀러에게, 죽어가는 아마존의 모습은 거룩한 계시였다. 그는 유태인만 증오했던 것이 아니다. 파시즘이란 망탈리테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 하는 철학이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지옥 타르타로스에서, 자신의 몸 보다 수십배가 큰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바윗돌은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이 형벌은 영원히 되풀이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에게 시지푸스는 일종의 뮤즈였다. 현대인의 삶의 표상이 바로 시지푸스였던 셈이다. 매일 매일 읽어야 할 책들과 씨름하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인기없는 미술관련 글을 비루하게 써내려 가는 진부한 생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하는 그림. <시지푸스의 신화>. 현실의 조건이 내가 꿈꾸는 삶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이름붙인 카뮈의 글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하루다.

 

문제는 히틀러는 이 그림을 아주 다르게 봤다. 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지고, 경제적 곤핍과 피폐의 극단을 달렸던 독일. 그 민중에게 시지푸스의 형벌을 '군사적 무장과 게르만 정신의 충일'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고 사기를 친 것이다. 본의 아니게 화가의 상상력은 독재자 히틀러에게 대중조작을 위한 이미지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시지푸스의 신화

 

주경복 교수의 <교육개혁의 시지푸스 신화>란 글을 읽었다. 한국의 교육 현안들이 순환적 구조속에 묶여 있기에 <시지푸스의 신화>를 재생산한다는 그의 말에 동감한다. 일반 신문매체를 비롯,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이 땅엔 교육에 관한 수많은 주장과 담론이 펼쳐지지만, 근본을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글이나 말은 보기가 어렵다. 우리는 흔히 '근본적 대책'을 세우자는 말을 하면 진보나 보수 양쪽 모두, 선별적 대책을 이야기 하며 현 체제를 옹호한다.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바위를 굴리게 하는 시지푸스의 망령을 깨지 못한채, 단타성 의제와 정책만이 판을 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세대에서 이 과제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이렇게 숙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야 하는 것인지. 방관하는 우리 모두가 <시지푸스의 신화>를 보며 희열감을 느꼈던 히틀러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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