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농부로 살고 싶다
조르주 루오의 <색채의 연금술사>展 리뷰
거울 앞에서-얼굴을 보다가
자원봉사를 하는 보육원에서 김장을 했습니다. 3년 째 원장수녀님 손길을 도와 배추를 절이고 젓갈과 속을 준비해 채웁니다. 발그레하게 물든 배추속살을 보니, 늦은 김장이지만 힘이 났습니다. 소금물에 절인 배추 포기를 들어 옮길 때마다 겨울 기운에 발끝이 시리지만, 땅을 걸을 때마다 묻어나는 하얀 발자국 소리가 좋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거울을 보는 데, 일상에서 찾을 수 없던 제 얼굴이 드러나네요. 지금까지 난, 얼마나 내 얼굴에 책임을 지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얼굴을 가리켜 폄하하는 말로, 면상이란 표현을 씁니다. 상(相)은 한자의 의미대로 어떤 마음 밭을 일궈왔는지 살펴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의 흔적과, 사유의 무게, 타인에 대한 배려, 정치적 입장, 라이프 스타일 등 이 모든 것이 무늬처럼 얼굴에 새겨집니다. 정신의 이력서가 되는 셈이죠.
성과 속, 비루한 일상 속에 깃든 신성의 세계
오전 내내 작업을 마치고 서둘러 미술관에 갔습니다. 조르주 루오의 미완성 작품들이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날이거든요. 루오는 흔히 기독교적 화가, 현대의 성화를 완성한 거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렘브란트에 비견되는 종교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죠. 종교(Religion)의 어원이 된 라틴어 Religare의 뜻은 ‘연결하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어원의 역사를 묻는 질문은 오늘 소개할 루오전의 핵심적 가치를 말해줄 것입니다. 종교는 땅의 인간과 신의 소명을 연결합니다.
성과 속의 세계를 연결해 비루한 지상의 무대에 신의 오롯하고 따스한 배려를 채웁니다. 루오는 자신을 비범한 천상의 화가로 그리기 보다, 끊임없이 그림을 습작하는 견습공으로 그렸습니다. 그가 54세에 그렸다는 자화상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루오는 1905년 작가이자 비평가인 에두아르 쉬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모두는 반짝거리는 의상을 입은 서커스의 어릿광대이며, 화가의 역할은 이러한 외적 허영 뒤에 존재하는 영혼을 보이기 위하여 이 옷들을 벗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자화상엔 그의 주장이 그대로 배어나지요. 흰색 모자는 마치 예수의 후광처럼 보이고 푸른 톤으로 가득한 배경은 중세의 성상화를 연상시킵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을 대언한 그리스도의 주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화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빌어 예수의 모습을 체현해냅니다.
루오 <베로니카> 캔버스에 유채, 퐁피두 센터
<베로니카>란 작품도 바로 그런 인식의 연장선 속에 있는 작품이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땀을 닦은 베로니카의 베일에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오톨도톨한 화면위로 하얀색 베일을 쓴 베로니카, 뜨거운 내면의 신앙을 불의 도장처럼 찍어낸 베일은 매일 그녀가 입어야 할 소망의 옷입니다. 이렇게 화가는 그림을 통해 성(聖)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제는 그가 그린 속(俗)의 세계를 살펴야 합니다. 그의 관심은 최하위층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있었고, 항상 그림을 통해 그들 곁에 있었지요. 그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서커스>연작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퍼레이드’와 ‘부상당한 광대’ ‘곡예사’와 같은 작품은 일견, 1900년대 파리의 대중 오락이었던 서커스의 단면을 그렸습니다. 서커스는 루오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본 유랑극단의 퍼레이드의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다수를 위한 유흥거리, 서커스는 산업화에 의해 날로 빈부격차가 커지는 파리에서 소외계층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어느 시대나 경제적으로 힘든 계층은 당대의 값싼 연예오락에 열을 올림으로써 일상의 비루함을 잊으려 노력합니다. 대공황시절 5센트짜리 영화관이 인기를 끈 것처럼 말이죠.
서커스 연작 중에서
부상당한 서커스 단원
서커스 연작 중에서
루오는 말합니다. “마차의 한 구석에 앉아 반짝이고 얼룩덜룩한 옷을 깁는 늙은 광대, 웃기기 위해 만들어진 반짝이는 것들과 대조되는 슬픈 삶 사이의 대조 그 속에서 우리를 본다”라고요.
눈물범벅이 된 채 무대 아래를 내려오는 ‘부상당한 광대’의 모습. 그를 따라 인도하는 두 명의 큰 광대와 작은 광대를 통해, 역경 속에 자리하는 구원에 대한 신뢰를 그렸습니다. 루오의 그림은 초록과 푸른 빛의 강렬하게 머무는 공간입니다. 일견에는 쓸쓸하고 상처받은 영혼의 공간 같지만, 그 속에는 상처(scar)를 별(star)로 만들어 투명한 하늘에 띄우는 화가의 눈물이 있습니다. 두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스펠링 차이로 아픔은 꿈이 됩니다.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란 작품은 성서의 ‘돌아온 탕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만난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고통에서 소망으로 돌아오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했습니다. 이 작품을 가리켜 루오는 “예수는 만족한다. 가방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순수한 가슴과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가난한 순례자의 단순하고 부드러운 삶 속에서”라고 작품 후기를 남겼는데요. 가방을 채우는 소도구로만 사용해온 도시인의 욕망에, 반성을 촉구하는 것 같아 그림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다시 거울 앞에서-그림 그리는 농부를 꿈꾸며
시인과 농부는 원래 한 핏줄에서 났을지도 모른다. 나의 펜은 나의 쟁기, 쟁기가 부드러운 흙을 일궈 밭을 갈듯 나는 원고지를 갈아 씨를 뿌린다. 간다는 것은 뒤집어엎는다는 것, 혁명이 굳은 이념을 개고 새것을 창조해 내듯 뒤집힌 흙에서만 씨앗은 새싹을 움튀운다. 오세영의 –농부- 중에서
집에 오는 길, 시인 오세영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시인에게 농부의 밭을 가는 일과 한 편의 시를 잉태하는 일은 동일한 수고가 필요한 것이었죠. 루오의 작품 또한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회화란 경작지에 묶여 있는 농부다"라고 표현합니다.
땅을 일구는 일에 자신의 그림 그리기 작업을 연결한 것이지요. 고단한 현실의 삶, 속의 세계에서 성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화가의 노력이 아름답습니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 중, 땅의 사람을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이 유독 눈에 걸렸습니다.
그림 속 인간의 빛은 초록에서 청색으로, 또 다시 따스한 노랑과 주황으로 변화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변모하는 그의 생애와 시선이 유독 부러운 이유입니다. 색채의 연금술이란 비단 화면을 채우는 화가의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루한 생의 무게를 감내며 사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하늘의 소망과 땅의 현실을 연결하는 ‘환희의 빛’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거울을 다시 봐야겠습니다. 어떤 얼굴로 이 차가운 도시의 대지 위를 걸을지 조용히 자문해 보려 합니다. 2010년이 밝아옵니다. <김홍기의 갤러리 가는 길>은 올 한해도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행복한 그림으로 생을 채색하는 연금술사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본 글은 문화공간 1월호 특집기사로 송고한 원고입니다. 2010년 한해를 시작하면서 루오가 그림을 그렸던 마음으로 여러분께 다가 서려는 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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