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욱_비빔밥이야기1_캔버스에 유채_218.2×291cm_2008
S#1 비빔밥에 대한 명상
인터넷이 뜨겁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란 기자가 칼럼을 통해, 비빔밥의 의미를 폄하했다. 본인은 거친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번째 비빔밥 폄하글을 쓸 모양이다. "겉으로는 예쁜 모양을 한 비빔밥이지만 실제 먹을 땐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변한다"며 '양두구육'(羊頭狗肉,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의미)이라는 표현을 썼다. 음식문화는 패션과 더불어 당대의 문화접변 현상의 프론티어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문화적 해석은 해석을 내린자가, 평가를 받는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시각이 뒷받침 되기 마련이다.
김진욱_풍요-비빔밥이야기_캔버스에 유채130.3×162cm_2006
1800년대 말엽의 발행된 시의전서란 문헌이 있다. 최초로 비빔밥의 존재가 등재된 문헌인데, 여기에는 비빔밥을 부뷤밥으로 표기한다. 한자로는 골동반이라 부르는데 아마도 드라마 '대장금'을 본 이들은 골동반을 먹는 장면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골동반의 汨 은 '어지러울 골' 자이며, 董 은 '비빔밥 동'자인데 汨董 이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다는 뜻이니, 고슬고슬한 밥에 여러가지 찬을 어우러 먹는 방식의 요리란 뜻이다.
난 한해가 시작하는 1월이면 작가 김진욱이 그린 <비빔밥 이야기> 그림을 종종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국 기업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건 어울림의 힘이며, 우리 모두의 장점이 새콤달콤하게 용해될 때 나온다. 비빔밥은 사업가의 고민을 한방에 보내는 강력한 치료제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큰 세계를 이룬다.
S#2 구로다는 왜 비빔밥을 폄하했을까?
"겉으로 볼때는 예쁜데 먹을 때는 엉망진창이 된다'는 구로다의 논리는 현대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졸렬하다.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크가 이 비빔밥을 본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나물은 언어적으로 볼 때 독립적으로 발화된 단어다. 이 나물이 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만든다. 바로 파롤이 섞여 랑그(langue)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거나 섞어 먹는것이 아니다. 어울림을 위한 엄정한 전제조건과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한국의 오방색과 자연에 대한 색채감각이 보색대비를 통해 찬란한 꿈을 꾸는 무대. 이것이 비빔밥의 미학이다. 바르트적 표현으로 하면 다중절합(Multiple Articulation)이다. 절합이란 우리의 신체 내의 뼈들이 마디구조를 이루며 서로를 지탱하듯, 의미적으로 결합하고 지탱하면서 신체란 전체를 떠받드는 현상, 혹은 상황을 말한다.
이에 반해 일본의 스시는 철저하게 봉쇄된 세계의 축소판이다. 요리사는 밥물을 맞추고 고슬고슬하게 뜸들여 지은 밥을 식혀 식초와 간을 해서 기반을 만들다. 오랜 장인의 손에서 빚어지는 스시는 밥알의 개수까지도 통제될 만큼, 요리사 일인의 손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 독재자의 면모를 띈 요리란 점이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볼때 고결한 확실성과 우아함을 가진 요리임에는 맞다. 단 의사소통이란 관점에서 볼 때는 동의하기 어렵다. 의미 전달자와 수용자간의 관계가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수용자는(먹는이) 요리사가 준 스시의 형태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있는 질서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런점에서 기본의 형틀과 제도,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보수 우익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 스타일이다.
모든 세상의 텍스트는 수용자를 통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스시에 대해 적용하기 어렵다. 비빔밥은 수용자에게 다양한 선택권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것으로 규정한 구로다의 식습관도 하나의 경우의 수에 불과할 뿐. 헛헛한 하루를 보낸 어떤 시인에겐 '참기름을 넣지 않고' 먹는 방식일 수 있고, 나물 자체의 간에만 의존해, 재료의 신선한 맛을 즐기려는 이도 있다. 형태론적 가능성과 조합의 수가 그만큼 풍성하다. 붉은 고추장을 통해 색채적으로, 미각적으로 제 3의 맛을 창출한다. 비빔의 연금술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미감이다.
스시는 반토막을 내거나,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새우회만 살짝 먹고 밥을 뒤에 먹진 않는다. 먹는 사람의 입장에선 어떤 상상력도 발휘하기가 어렵다. 닫혀있는 세계다. 젓가락을 사용해 먹어야 하기에, 배제와 차별의 철학을 내재화 하는 요리가 되어버렸다.
일본 내 극우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산케이 신문의 기자답게, 자신의 정치적 미감을 요리에 강요하는 시선으로 글을 쓴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비빔밥 하면 떠오르는게 양푼 비빔밥이다. 18세기부터 사람들은 새참을 위해 큰 곳에 한꺼번에 재료를 넣고 비벼먹는 식습관을 발달시켰다. 재료를 배제하기 보단, 어울어 함께 하는 태도를 함양시켰다. 한국의 숟가락은 오목과 볼록의 세계를 한꺼번에 담아, 배고픈 아들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의 부푼 젖가슴을 연상케 한다. 구로다 기자에게 이 조화와 상하구분없이 어울림의 미학을 보이는 요리는 '위험한' 것이다. 천황을 위계로 질서잡힌 소우주를 꿈꾸는 우익의 사고엔 비빔밥은 매우 불온한 요리일 수 밖에 없다.
최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결합이라는 '통섭'이란 화두가 유행이다. '함께 도약한다'는 뜻의 이 통섭은 작은 가지들을 모아 큰 가지로 접목해 길을 내는 것을 말한다. 비빔밥은 우리 민중이 보여준 식문화의 통섭이다. 고추장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식재료의 맛을 감한다는 견해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고추장의 붉은 기운은 우리 민족의 오방색중, 그저 따스함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화합은 동조와 지원, 껴안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붉은 기운은 그런 심경을 표현하는 내면의 빛깔이다. 비빔밥의 미학속에 용해된 '어울림'과 '화합'이야 말로 점점 더 비대칭적인 기형으로 변모해가는 '세계화'를 치유하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구로다가 뭐라든, 난 비빔밥을 먹으며, 독립된 색감이 제3의 미감으로 변화하는 기적을, 미각의 연금술을 경험할 것이다.
2010년 우리 모두가 비빔밥처럼, 하나로 비벼지면 좋겠다. 음지엔 햇살이 들고, 부정이 판치는 세상엔 정의의 하수가 흐르듯 멋진 세상을 비빔밥 한 그릇에서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구로다에겐 그저 상상력이 부족할 뿐이다. 참 안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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