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내 영혼의 상처를 감싸는 붕대
텐도 아라타의 <붕대클럽>을 읽었습니다. 그는 저명한 추리소설가입니다. <붕대클럽> ‘남의 상처에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조"가 가득한 청소년을 보며,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작품입니다. 이전 그의 작품과는 많이 다르죠. 주인공인 고3 와라는 무엇하나 잘 풀리는 것이 없습니다. 손목을 다쳐 병원에서 붕대를 하고 돌아온 날, 디노란 아이가 자신의 손에서 붕대를 풀어 계단에 묶습니다. 이후 마술처럼 아픈 상처가 치유되죠. 부모님의 이혼, 절교, 불의의 사고, 실연, 수험의 실패 등 소설 속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마음의 상처로 가득합니다. 한 소년이 시작한 타인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일이 많은 이들의 의뢰를 받게 되고, 이후 청소년들은 붕대클럽을 결성,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며 성장합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 마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화 되었는데요. 배우 야기라 유야가 맡은 디노역이 시종일관 눈에 들어오더군요. 알고보니 2004년 57회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랍니다.
권경엽_Bleached Memory1_캔버스에 유채_162×227.3cm_2009
권경엽 작가님이 이번에 개인전을 열었네요. 책을 쓰면서 권경엽 작가를 만나 꽤 오랜동안 인터뷰를 했습니다. 참 다부진 여자다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상처와 그것을 극복하는 눈물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번 전시도 <기억의 공간>이란 제목입니다. 여기에서 공간은 다름아닌 상처를 기억하고 극복하는 몸을 말합니다. 작품 제목을 보니 <표백된 기억>이네요. 상처라고 하면 흔히 우울을 비롯해서 아픈 감정들이 대부분이죠. 그리스인들은 우울과 같은 정신작용을 검은빛깔의 담즘이 분비되는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권경엽_Bleached Memory2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 속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가지 않는 무정형의 사람들의 머리 속엔 항상 하얀 붕대가 매어져있습니다. 신체는 상처를 기억하는 첫단계의 매개체죠. 우리 신체는 항상성이란 생물학적 법칙을 따릅니다.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은 자신의 최적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특성을 말하죠. 생명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더울 때 땀을 흘리는 일은 작은 예일 뿐입니다. 권경엽에게 있어 신체는 상처란 정신적 작용을 방어하고 막고, 혹은 봉쇄하는 매체입니다. 특히 그림 속 주인공들이 백색의 붕대를 맨것은 감정의 흐름을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의지입니다.
권경엽_Adios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권경엽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영화 <붕대클럽>에서 보았던 소녀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체에 각인된 슬픔, 상처를 감내하기엔 너무나도 약한 청소년들. 히키고모리라 불리는 외똘이형 인간들이 양산되고, 게임중독에 빠지고, 무목적인 연예인 추종에 흔들리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의 상처를 감싸는 붕대감기 행위가 일종의 상징이었듯, 권경엽의 그림 속 붕대 또한 몸에 각인되는 상처의 빛깔을, 순백으로 표백하고 긍정의 기억으로만 담으려는 의지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권경엽_Black Nails_캔버스에 유채_130×162.2cm_2009
그러고 보니, 권경엽의 그림을 처음 봤던 날도 비가오는 다소 우울한 빛깔의 하루였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땐 한껏 울어서 차라리 안에 있는 어둠의 기운을 다 빼버리라던 어느 소설가의 조언을 듣고 돌아오던 날. 그림 속 아이처럼 따스한 백색의 붕대를 몸에 둘둘 말고 싶었죠.
권경엽_Remember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9
이번 초겨울에 담양에서 오랜 산책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관방제림을 구성하는 겨울 나목들이 추운 한기를 견뎌내며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죠.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들과 내 몸이 겹쳐지며, 그렇게 숲길을 걸었습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황량한 초겨울의 풍경이지만, 바람은 파르스름한 목피껍질을 빗질하며, 따스하게 기분좋게 지나갑니다. 자연 속을 거닐 땐 항상 자문하게 됩니다. 나무들이 내뿜는 숨결보다 훨씬 더 큰 뿌리깊은 숨결과 내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권경엽_Space of Memory_캔버스에 유채_162.2×130cm_2009
권경엽의 그림을 보고 난 날은 항상 소롯한 마음과 따스한 기운이 교차합니다. 나는 어떤 육체를 가꾸어야 하는가? 외부환경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는 나. 정치가들의 온갖 사특한 거짓과 위선을 활자로 읽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갖혀 세뇌되며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정치적 환멸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잉태하는 이 무기력의 시간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나. 내 신체를 감싸 외부의 상처로 부터 지켜줄 수 있는 어떤 거대한 힘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그녀의 그림 속 주인공들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처럼, 내 눈물도 이 환멸의 땅에 떨어져 비옥한 토지를 만드는 결정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슬픔이 너무나 큰 날엔, 자연 속을 거닐어 볼 일입니다.
미세한 생의 입자가 빛 아래 섞이며, 내 큰 호흡을 조율합니다. 상처와 아픔은
이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는 조형자의 힘 앞에 반드시 극복될 것이란 믿음. 그 마음을
다부지게 잡고, 다시 한번 걸어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요.
물론 질감 좋은 붕대도 하나 꼭 준비하시구요.....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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