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우창헌의 그림展

패션 큐레이터 2009. 12. 9. 00:17

 

 

초혼 116.7×80.3 캔버스 유채 2009

 

저는 우창헌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하하미술관>의 집필을 마무리 하던 무렵

그의 그림을 만났습니다. 연두빛 가득한 화면 위로 두 사람이

따스하게 껴안고 있는 그림은 왠지 모를 내 안의

응어리를 풀어주었고, 힘을 주었습니다.

 

 

회생 100.0×80.3 캔버스 유채 2009

 

그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의 주제는 회생입니다.

삶의 부활이란 테마는 점점 더 지쳐가는 제게도 큰 힘이 되는 내용입니다.

오늘 사무실 창밖으로 보는 겨울 풍경이 유독 고왔습니다. 오전 한때

내린 함박눈으로 인해 세상이 하얗게 변할것만 같았거든요.

 

 

작은 사람의 마을 60.6×50.0 캔버스 유채 2009

 

불교의 연기설은 살아숨쉬는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내 삶이 상호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터넷 공간의 역동성과 그 결합성을 고려해보면

그저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은 우리들에게 다중의 자아를

선사했고, 여러 개의 자아의 옷을 입은 우리들은 이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

갖은 욕설과 비방을 쏟아내는 플레이밍(Flaming) 현상에 빠지기도 하고

또한 그만큼의 자유와 창의력을 펼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하죠.

 

 

귀향 194.0×97.0 캔버스 유채 2009

 

지금 인터넷 공간은 겨울이란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창헌의 그림 속 세계처럼 <빛의 예감>은 언감생시 어렵습니다. 그림 속

연인의 포옹을 통해, 겨울에서 봄으로의 이행을 상징했던,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설교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는 언론을 통해 동일한 담론을

토해낼 뿐입니다. 서울이란 도시를 점점 더 비대한 곳으로 만들고 싶은

것인지, 이로 인해 우리안의 균형감, 나아가 국토의 균형감은

철저하게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겨울, 사람의 마을 145.5× 112.0 캔버스 유채 2009

 

지난 주 저는 담양을 비롯한 남도지역을 짧게나마

여행했습니다. 대나무의 도시답게, 청죽과 흑죽의 숲 사이로

흐르는 푸른 바람을 맞으며, 폐부속의 찌거기를 토하고 왔습니다. 숲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초겨울 숲의 속살들이 서로 맞물리며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내 삶도 그렇게 더불어 숲을 이뤄내며 때로는 한없이 조용히 울기도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내게 말해 봅니다. 서구화의 역사는 철저한 자기인정의 욕구에 빠져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에게 흡수시키려는 역사였습니다.

 

 

빛의 예감 259.0×194.0 캔버스 유채 2009

 

일방통행식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삶의 속도전을 외치는 한국과 같은 탈식민국가들의 정서엔

이런 서구화 초기의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 다시 한번 우리를 파헤치고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우창헌의 그림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만듭니다.

 

빛의 포로가 되어 물질주의에 빠진

우리들의 눈이 가려졌으면 하고 작가는 소망하는 듯

보입니다. 빛의 감옥에 갖혀, 우리 안의 범죄성을 깨닫고 빛의 제단에

무릎을 꿇어 참회의 눈물을 흘려주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이 비정성시의 구석 어디엔가

차갑고 탁탁막힌 생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계층의 삶이 떠올라

편안하게 글을 쓰는 시간이 송구합니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예산은 건설족들의

불린 배를 위해 다시 한번 소화되어야 하고, 짓밣혀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더더욱 화가 나는 건, 이제 더 이상 포털도 이런 눈물의 하소연을 듣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행한 일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도덕과 배려가 아닌, 경제담론만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소중한 표를 행사한 탓입니다. 국민에 대해 폭력을 일삼는 집단이

자신의 폭력행위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때, 그것은 법치가 아닌

자기들만의 공고한 세계를 지키는 수단이 될 뿐인것을.

 

 

빛의 예감 91.0×91.0 캔버스 유채 2009

 

점점 더 천박하게, 변해간 우리들의 자화상이

그대로 각인된 지금 이 땅의 정부를 볼때마다, 그들을 존속하게

하고 그들을 선택한 인간들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생의 무게로

절박한 이들일수록, 스펙이 낮은 사람일수록 조직 내에서 비도덕일지라도 실행능력이

있어 보이는 리더에게 끌린다는 경영학 연구의 내용이 와닿는 요즘입니다.

 

실행능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죠. 문제는 실행에 있어서

갖은 수단들, 비도덕적이고, 하지 말아야 할 방식까지 서슴지 않고

그저 목표달성을 위해 추한 방법까지 동원하는 것을 말하기에 문제인 겁니다.

스펙이 낮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사람들의 이행능력이 그저 부럽고

낮은 자신들이 성공할 방식처럼 비춰진다는 군요.

 

 

빛의 예감 91.0×91.0 캔버스 유채 2009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슬퍼런 차가움이 아픔의 속살을 헤집는 겨울의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해방의 봄을 맞듯,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상처, 우리들의 아픔은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저들의 세상속에 파랗게 용해되어 범죄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저들을 껴안아 줄것입니다. 그것이 희생이고, 회생입니다. 우리의 문명이, 우리의 정치가

푸른숲을 유지하며 지탱해온 바탕인 것이지요. 말이 길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이 땅의 상처받은 이들에게

우창헌의 그림을 선물로 보냅니다. 행복하소서.

 

 

4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