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곳-담양의 식영정과 명옥헌

패션 큐레이터 2009. 12. 3. 16:11

 

 

1박2일 동안 보성과 벌교, 순천만, 담양으로 이어지는 짧지 않은 동선을 거니는 시간. 이제 두번째 담양에서 보낸 한나절의 기록을 남길 차례군요. 아침부터 서둘러 차비를 하고 소쇄원을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몰핀님이 가져온 모과열매 때문에 그라시아님 차 속엔 달콤한 향이 가득 베었습니다. 소쇄원을 거쳐 그림자가 잠시 쉬어간다는 식영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소쇄원에 대해서는 마지막 편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흘러넘치는 이 땅의 지점이고, 문학과 건축, 조선미술사를 공부한 학생이면 한번쯤은 심도깊게 이곳을 둘러 곳곳을 보았겠지요. 제 부족한 글로 한편에다 담기 어려워 다음편으로 남겨둡니다. 저는 오히려 소쇄원 옆에 있는 식영정이 마음에 들더군요.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입니다. 서양에선 흔히 여름철의 무더위를 피해 귀족들은 별서정원이란 걸 건축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그 모델이었고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여름별장도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식영정도 이와 비슷한 논리에서 지어진 별장(정자)인 셈이지요. 또한 이곳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김성원이 쓴 『서하당유고』를 보면 명종 15년에 축조된 이곳에서 정철은 삶의 후반부를 지내며 『성산별곡』을 지었고, 많은 지인들과 함께 글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식영정을 단연 돋보기에 하는 건, 바로 정자의 전면과 후면, 측면의 공간을 적절하게 메우는 소나무숲입니다. 울창한 소나무 향 아래로 광주호의 적요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요. 정말 이만하면 그림자도 쉬어갈만큼, 고아한 풍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배롱나무가 피고, 연못에는 물이 많아 그 풍경이 더욱 고왔을 터입니다. 겨울에 여행을 한다는 건, 이런 화려한 드러냄의 속살을 보지 못한채 여행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해외의 유명한 여행지를 가도, 햇살이 길게 쬐이는 여름철이 더욱 신선하고 강력한 이미지를 발산하기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겨울여행이 좋습니다. 겨울의 북유럽이 좋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할 때도 겨울의 중심추를 지날 때였네요.

 

 

겨울 여행은 흔히 성수기라 불리는 여름철의 여행과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스산하고 애잔한 정서가 전체적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죠. 갈수기를 맞아 물이 줄어든 호수의 풍경, 조락의 계절을 지내고, 이제 한겨울 댓바람을 온 몸으로 외롭게 지내야 할 정자엔 사람의 발길이 조용합니다. 정자를 세운 기둥의 목질부분처럼, 인간의 상처가 혈흔이 되고 이것이 누적되어 토해낸 세월의 결이 알알이 새겨있는 셈입니다.

 

 

정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마시는 공기가 깨끗합니다.

 

 

식영정에서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명옥헌입니다. 조선 인조때 문인이었던 오희도의 아들 오명중이 지은 작은 정원입니다. 이 정원에는 장방형 형태의 장지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있어, 여름철에는 환하게 붉은 선혈빛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지요.

 

 

지금같은 갈수기가 아닌, 청량한 여름에는 유량도 풍부해서 이때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같다하여 명옥헌이라 했답니다. 그만큼 청량한 소리가 대지에 퍼졌겠지요.

 

 

담양을 여행하면서 마치 이곳이 빛을 담아내는 곳이라 해서 담양이라 부른건 아닐까 생각에 빠져봅니다. 겨울의 햇살은 짧고 찬란하지만 그 따스한 기운은 여전히 주변의 풍광을 조율하고 지배하지 않으며, 마디마디에 녹아있는 생의 이력과 환희들을 담지하는 그릇이 될테니까요.

 

 

다른건 몰라도 이번 1박 2일 여행하면서 차로 이동을 하긴 해도, 되도록이면 많이 걷고 산책하고 싶었답니다. 물에 비친 제 그림자의 모습도 다시 살펴보고요. 그림자란 그의 분신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영혼을 자각하면서, 그림자의 역사도 시작되지요. 미술사에서 그림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그림이 르네상스 시절에 나왔다는 건, 그만큼 그림자가 인간의 인식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거리를 걸으며 제 자신에게 비춰진 빛의 암영들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내 그림자가 누군가에게 서늘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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