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보낸 시간, 숙소를 나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걸었습니다.
'
유리로 지은 3개의 건물, 바다와 하늘.......
이렇게 널찍한 장소에서 거닐어 보기도 얼마만인지요.
길을 걸을 때마다 발자욱을 옮기는 바닥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서구에선 중세시절 부터 성과 교회를 건축할 때, 이 바닥재와 모자이크화된
바닥을 이어붙이며 하늘과 땅의 균열을 메우는 상상을 했다지요.
제주의 색다른 모습과 풍광을 눈에 넣어 오던 날......
비록 하늘을 짙은 구름이 끼었고 공항에 도착하던 시간엔 비가 흩뿌렸지만
이렇게 쾌적하게 산책을 해본 적이 과연 있었나
서울이란 공간에서 너무나도 '빨리빨리'병에 빠져 산 제 자신이 생각났습니다.
억새군락을 통해 걷는 길......
들리는 바람의 소리, 그 길을 걷다보면
내 안에서 응어리진 마음의 소리도 들립니다.
멀리 보이는 교회 십자가도 고즈넉하고
해안을 지키는 외로운 등대
그곳으로 가는 길은 즐겁습니다.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드디어 갤러리 지니어스 로사이에
도착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지요. 명상과 영성의 깨우침을 목표로
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순례길을 맛보게 하는 종교건축물입니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이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란 뜻이랍니다.
섭지코지 옆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하늘과 바람과 물을 연결해, 그 속에
가득한 신성을, 거룩한 영성의 자리를 채우고 사람들을 맞습니다. 노출 콘트리트의
차가운 질감으로 벽면과 내부를 장식한 것은, 겉면에 화려한 채색이나 조각 장식을
붙이는 서구의 교회건축에 대한 반성입니다. 오히려 동양의 선적 공간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곳이라고 봐야지요.
지니어스 로사이는 철저하게 하늘과 자연 물이 건축 내부에서
흐르고 부대끼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을 맞이합니다. 신성한 공간은 어떻게서든
자연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이때 "자연은 건축을 통해 새롭게 빚어진 자연"이라는 그의
철학이 오롯하게 녹아있습니다. 공간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니어스 로사이는
바람의 방과 물의 공간, 억새들이 자라는 공간으로 나뉘고, 그 속에 성과 속의
세계를 연결하는 자연의 아이콘을 담아냅니다.
현무암 덩어리를 쌓아놓은 길 사이로 걸어갑니다.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건축에 신성을 담기 위해, 성경에서 읽어낸
은유들을 건축물에 옷처럼 입히는데요. 거친 질감의 현무암들이 즐비하게
놓인 길을 걷자면, 광야에서 '신의 현현'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만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메세지는
당대의 사유체계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전하기는
외로운 것입니다. 삶 자체가 광야이고 그 속에 던져진채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실존적 삶은, 그 광야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안도 다다오의 종교적 상상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4면의 콘트리트 벽을 만들고 그 속에 사람 키높이의 억새를 심어
바람과 햇살과 소리를 가둡니다. 그러나 가두어진 것이 곧 소리의 봉쇄나 닫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풍화하는 풀들의 속살이 빚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 내재된 자연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음률을
들어보라는 뜻이겠지요.
이제 물의 공간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카메라로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만
비스듬히 사면으로 내려오는 면 위로 끊임없이 물이 흐릅니다.
자연의 변화를 상징하는 물의 운동성을 나타낸 것이죠.
그곳을 지나면 외부와 내부로 난 벽면을 뚫어
일출을 볼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는
항상 겉과 안/내부와 외부가 작은 틈새나 창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세부터 집(Casa)은 신의 영광과 지상의 염원을
연결하는 일종의 은유였습니다. 지상의 삶이 험난할 때마다
7가지 보석으로 건축한 하늘의 집을 바라보는 것. 돌아갈 추억의 길과
집이 있다는 것은 비루한 생의 애환을 마중하는 영혼의 안식처의 역할이겠죠.
내부로 들어가면 3가지의 미디어 아트 작품을 볼수 있습니다.
로사이 내부는 철저하게 빛이 단절되어 있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묵상을
하거나 명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빛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그 내부에 빛을 제거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빛'의 존재를 찾아보라고 말하기 위해서죠.
미디어 아티스트 문경원의 3가지 작품을 주목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Diary란 작품은 나무의 생장과 사멸을 통해 생을 반추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고, '어제의 오늘'은 실시간으로 하늘을 비추는 카메라로 인해, 제주의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면모를 살피며, 찰나의 덧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풍경'이란 작품을 보면 조금 전 설명드렸던
입구 쪽 틈 사이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모습을 시시각각 보여줌으로서
현재위치의 나 자신에 대해 떠올려 볼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지니어스 로사이를 나와 다시 걷습니다.
등대로 가는 길,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 군락.
꽃멀미가 날 정도로 환한 샤프란빛 유채의 향과 빛깔이 곱습니다.
올 겨울 너무나도 추웠던 탓이었을까요?
차가운 비정성시의 도시, 한 켠에서는 더더욱 벌어진
생의 격차로 인해 아프고 구토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이 지상의 아픈 이들에게
저 유채꽃처럼 환한 미소와 생명력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꽃의 기적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지금 이 정권이 그렇지요.
바다의 속살 향기를 퍼다 올리는 지천의 바람이
휘모리 장단으로 불어올 때 쯤, 지니어스 로사이에서 보낸
짧은 명상의 시간은 비로소 끝이 납니다. 엄마의 따스한 젖가슴 같은
둥근 오름을 껴안고 오르는 시간. 비릿한 고독은 너무나 현실과 다른 빛깔로 피어나
현란하게 내 눈앞을 어지럽히는 유채의 환 속에서 조금씩 길을 잃어갑니다.
걷고 생각하고 털어놓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던 짧디 짧았던 제주의 시간.
이제 그 시간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치열한 생의 도열 속으로 들어갑니다.
행복한 쉼의 시간을 준 자연과 함께 해준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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