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차가운 한파를 견디는 방법-대지의 풀들에게 묻다

패션 큐레이터 2009. 11. 3. 23:40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9

오늘 아침, 출근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한 겨울에나 꺼내입었을 외투를 입고, 벙어리 같은 호주머니에

손을 채운 후,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군요. 거리엔

노랑색 은행잎파리가 더 이상 토해낼 내면의 색을 상실한 채, 조락의 시간을 채웁니다.

절정의 순간에서, 겨울의 신산함을 미처 준비할 정신의 여백을 갖지 못한 채

맞게된 이 차갑고도 지리한 겨울아침의 일상이 선뜻 익숙치 않네요.

 

저번 주, 몸살이 나서 좀 고생했는데, 이 몸 속에 든

아픈 기운이란 것도 되돌아보면 참 신기한 것이, 들어올때와

나갈 때를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갑자기 이뤄지는 통에, 환영과 작별을

못하고 보냅니다. 글쓰기가 부진한 이유도 결국 때를 조율하지 못하는 게으름뱅이

탓일테지요. 다행히 저는 차가운 겨울의 시간, 가장 글을 잘 쓴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한파를 뜨거운 열혈 글쓰기를 통해 넘어가보려 한답니다.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72.7×116.7cm_2009

작가 김희재의 그림 속 세상은 달빛에 조응된 풀의 세상입니다.

'소요유'란 표현이 있습니다, 결국 달빛 아래, 정치적 환멸이나 일상의

비루함 모두를 넘어, 그저 탈색된 자연의 본질 속으로 난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그림을 보자니, 일상의 무게, 갑작스런 한파에 리듬을 잃어버린

우리모두, 탈속과 관조의 세상인, 그 곳으로 그저 발걸음을 옮기고 싶네요.

엉겅퀴를 비롯, 대지위에 피어나는 풀들의 형세를 섬세하게 칼로 빚어낸 작가의

손길도 놀랍습니다. 일상의 사물을 보는 작가의 눈이 그만큼 날카로우려니와, 그 속에서도

자신의 선험적인 경험 속에 녹아난 그 어떤 것이 풀들의 여린 움직임과 만났기

때문이겠지요. 지극한 침묵속에서 풀들은 서로의 몸을 부비며 작은

영혼의 열기를 만들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8

오늘 인상주의의 역사에 관한 논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인상주의란 거대한 흐름이

우리에게 말하는 지혜는 외광, 바로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의 풍경, 그 속으로

쏟아지는 빛의 변화와 명멸하는 순간의 기억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빛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러나 탈색된 빛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어둠 속 고요 속에

잎파리의 떨림을 느낄수 있기에, 낮의 부산함보단, 동트는 새벽의

여명이 더욱 인간을 뜨겁게 만들지요. 

 

작가 김희재의 그림 속 엉겅퀴가 주는 매력은

바로 탈색된 빛 아래 놓여져, 생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주는

저 강력한 힘에 있습니다.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89.4×145.5cm_2009

오늘같이 차가운 한기가 온 몸을 뚫는 날엔

저 찬 달빛 아래 서로의 몸을 묶고 연대하는 풀들의 사연이

더욱 힘이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이 계절의 신산함을 이겨내는 것이

어찌나 아름다운 지요.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힘겨운 삶을 사는 분들의 일상은

더욱 퍽퍽해질 듯 합니다. 올해는 연탄배달을 더 서둘러야 하는 것인지

매년 해오는 것이지만, 좀 더 신경써야겠습니다.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9

4대강 정리와 같은 목적없는 사업을 위해 가차없이 포기한

복지예산이며, 따스한 돌봄의 원칙을 잃어버린 정부로 인해, 올해는

한파속에 아픈 사람의 숫자가 더욱 늘겠군요. 요즘들어 정부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수사학들이 십자포화를 맞는 형국입니다. 그럴수 밖에요. 어차피 정당성이 결핍된

말의 잔치였으니, 저 풀들의 떨림처럼, 진정성이 담긴 공감이 이루어지긴 애초 어려웠던 걸겁니다.

사회에서 낙오되고 무너진 사회적 안전망에 주검처럼 덕지덕지, 마치 명태덕장의 북어들처럼 죽음의

공간으로 내몰린 이 땅의 소외자들이 몸부침을 칩니다. 추운 겨울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침묵의 동면을 버텨야 할 아픈 영혼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을 이 동토의 땅.

 

맘몬의 신을 섬기고, 돌봄과 배려의 미학을 잃은

신자유주의 정권의 겨울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타인을 껴안을 속살의 온기마저 냉각된 지표가 되어

침묵의 동면에 빠지지 않길 기도할 뿐입니다.  

 

김희재_기억속으로(into the memory)_캔버스에 유채_89×145.5cm_2009

갑작스런 한파로 첫눈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다지만

세월이 흘렀는지, 첫눈이 오면 전화를 하고 싶은 친구의 모습보다

꺼질 듯 죽어가는 숨소리에 조문하고, 한기에 웅크린 채, 편만하게 차오른

생의 절망을 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온통 신문지상에선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거짓지표만 늘어놓고 있는 지금, 어디에도 실물경제를 체감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따스한 구전의 증거는 없는, 거짓이 거짓에게 말을 건내는

이 부도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저 대지의 풀들에게

믈어야 할까 봅니다. 작은 목례라도 올려야지요.

 

잠들곳이 있다는 것과 언제나 난방을 할 수 있는 따스한

나만의 방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행복일 줄 몰랐으니 이 또한 죄송한

마음입니다. 올해가 가기전 작년보다 더욱 기부액을 늘이겠다는 작은 소망 이외엔

그리 확진된 그 무엇을 할수 없는 제 자신이 초라하군요. 작은 불꽃 하나라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불꽃 옆에서 곁불을

쬐는 이들이 많아지고, 그로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살아가는 이 시간이 더욱 행복할 것 같네요.

 

주변을 좀 돌아봐 주세요......

그렇게 해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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