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행복을 키우는 정원사-이혜임의 그림을 보다가

패션 큐레이터 2009. 11. 19. 23:10

 

 

이혜임_기억 3월 6일(Memory, March 6th)_162.2×130.3cm_2009

사무실에서 무료한 일상의 오후를 보내다

문득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봅니다. 손끝에 와닿는 겨울의

한기가 생의 작은 이력들이 메워진 금을 따라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초겨울의 도시풍경은 신산합니다. 거리의 양편으로 즐비하게

서 있는 가로수들은 이제 모든 내면의 생을 이끌었던 에너지들을 다 토해냈는지, 잎파리 하나

장식하지 못한채, 벌거벗은 나신의 형상으로 겨울의 환을 견디고 있습니다.

 

나무를 볼때마다 잔인한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겨울 한서리가 오기 전, 나무의 귀를 잘라 바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고요. 함박눈 내려, 사람들의 옅은 혈흔자국 뭍어나는 표피에 추위가

배어나지 않도록 나무의 혀를 잘라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아니 내가

무서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속에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 정치적 환멸의 시대에

모든 고통을 이렇게 해서라도 그냥 차단하고 싶은 마음인가 봅니다.

 

이혜임_그대 떠나던 날 1(Leaving Me 1)_162.2×112.2cm_2008

작가 이혜임은 캔버스에 나무로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화면 속엔 자연의 속삭임과 나무가 토해내는 화려한 웃음빛이 흘러넘칩니다.

야자와 매화, 향나무 등 다양한 꽃수종이 생육 번성하는 영혼의 정원에서, 화가는 나무를

통해 생명과 죽음의 사이클을 배우고, 반복되는 우주의 리듬과 질서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 합니다. 나무는 생명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보다

더불어 숲을 이루며, 그 속에서 다양한 생명의 원천을 함께

소환해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혜임_꽃 비 4월 24일(Arpil Flower Rain )_45.5×37.9cm_2008

바람의 기운을 타고 오르며 피를 토할 듯 할퀴고

싸우다가도, 도란도란 연리지가 되어 짙푸른 청록빛 사랑을 뜨거운

여름철 내면의 가마 속에서 구워내는 저 기적의 힘을 우리는 매년 발견하고 맙니다.

뿌리를 같이하는 두 그루의 나무가 어우러져 하나의 나무가 되는 것 연리지의

형상 속엔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지켜야 할 생의 예의와 법,

따스한 배려의 질서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혜임_나비와 숨바꼭질2(hide-and-seek with butterfly2)_72.7×60.6cm_2008

작가 이혜임은 나무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녀의 그림 속 나무들은

자세히 보면 동그란 태양의 형상을 닮은 나무 기둥이 수직으로

뻗어 하늘에 대한 예배를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혜임_창문넘어 그대1 (Through the Window 1)_72.7×91cm_2009

어린시절 소녀였던 작가는 창가에 핀

향나무를 보며 누군가를 그 짙은 향의 궤적을 따라

그리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나가버린 유년의

기억이 아로마향처럼 내 안에서 솟아나는 걸 이렇게 표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혜임_창문넘어 그대3(Through the Window 3)_72.7×91cm_2009

캔버스를 자세히 보면 나무 기중과 풍성하게

속살을 내미는 꽃다발을 콜라주 기법으로 붙여나갔습니다.

돌올하게 표면을 향해 올이 생긴 종이위로 나무와 꽃이 환하게 피어납니다.

식물을 가꾸는 일이 행복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한다며 행복을 키우는 정원사가 될

요량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화면 속에서 생의 강력한 애정과 애착이 느껴집니다.

 

이혜임_행복한 말(Happy Horse)_60.6×72.7cm_2008

생을 이끄는 힘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때때로 삶의 좌표를 잃고 헤맬때 큰 에너지가

되겠지요. 그림 속 화면엔 낮과 밤 두 개의 시간이 함께 존재함을

알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시적인 빛 아래 놓이는 낮의 시간, 소멸과 죽음을 의미하는

밤의 시간, 그 속에서 자체 발광하며 스스로 빛나는 나무의 형상을 봅니다.

우리의 삶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의 빛으로 밤을 비추며

낮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무. 그 나무 한그루

마음속에 꼭 키워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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