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샤넬-미술관에 가다

전상옥의 패션화보 같은 그림-페티시를 아세요?

패션 큐레이터 2009. 9. 25. 17:01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116.8×91cm×2_2009

 

가을은 잡지를 즐겨보는 이들에겐

행복한 계절입니다. 특대호라 불리는 9-10월호 패션잡지는

풍성한 선물(다양한 화장품 샘플에서 패션비디오까지)을 제공하지요.

오죽하면 모 블로거는 자신은 9-10월에 나오는 패션잡지를 구매함으로써 필요한

모든 화장품을 얻을 수 있었노라며, '패션잡지로 겨울 화장품 얻는 방법'이란 글도 올라오더군요.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09

 

오늘 소개하는 작가 전상옥은 유명한 광고사진의

섹세하고 엣지있는, 관능적이지만 완전히 박제가 되어버린 패션

잡지 속 인간모델을 사진을 참조하여 거대한 캔버스에 옮기고 있습니다.

 

거의 사진같은 정교함으로 농밀의 순간을 익혀낸다는 점에선

극사실주의적 회화기법과 팝 아트와 연결됩니다만, 캔버스에 그려진

대상의 내면과, 그 이면의 속살을 헤집어보면, 또 다른 행간의 의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물신주의, 페티시즘의 우상화이자, 페티시즘에 스스로 빠져버린 우리

현대인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죠. 페티시즘은 소비주의로 얼룩진

우리들의 현대판 종교입니다. 페티시를 감각적 욕망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2_2008

 

흔히 패션사진을 가리켜 World of Bi Spread Wings 즉

두개의 펼침면 속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작품은 잡지의 한장 한장을

확대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작품들은 패션매거진의 모델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재현

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명품중독, 소비의 윤리가 전도된 세상을 그립니다.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09

 

최근 유사성행위 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철퇴를 맞은 곳이 바로 이 페티시를 이용해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 안마시설들이었습니다. 특히 간호사 복식과 여고생 교복을 입은

성접대부들에게 입혀 영업을 하다 걸렸지요. 특정 복식이 변태성욕과 만나는 지점이

페티시입니다. 여기엔 이미지가 포화된 세상속에서 윤리의

균형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이 녹아있습니다.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2_2008

 

페티시는 포르투갈어 '페이티소'가 변한 말이라고 하죠.

포르투갈의 어부들이 15세기 당시 서 아프리카의 기니아 연안의 흑인들이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놓고 주문을 걸고 예배하는 모습을 본 후, 이를

카톨릭적 전통과 결부시켜 만들어낸 말입니다.

 

19세기 성심리학자였던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이 페티시를
"여성신체의 특정부위와 관련된 개념과 욕정의 결합체 또는 여성복장의

특정 품목과 욕망의 결합체"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페티시즘의 연원을 따라가보면

무엇보다 일방적인 사랑의 순간, 균형이 깨져버린 인간의 사랑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성교 대신 페티시한 행위를 성의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독점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 그것입니다.




전상옥_A DRESS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08

 

패션에 대한 소비 또한 일종의 페티시라고 볼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 들어 건강한 소비와 윤리의식을 부르짖는 건 다른데 이유가

있는게 아닙니다. 패션에 홀릭하는 것, 그 자체를 비난하기 전에 패션과 유행이란

전반적 과정 내면에 있는 비도덕적인 노동과 아동착취, 자본의 유연화가

만든 '신노예제 사회'를 바로 보아야만, 우리가 진정한 패셔니스타로

태어날수 있다란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전상옥_A dress-skin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7

 

비 오는 날, 운전을 하다 문득 백화점 주변을

지나갑니다. 어둠 속 물방울을 지우며 집으로 가는 길
물방울엔 소비를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유전자가 부식되어

나타납니다. 한 벌의 드레스엔 해결되지 못한 내 욕망의 인자가

새겨있으며, 내적 부러움을 소비로 바꾸려 했던 내 마음의

아픈 검정 물방울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전상옥_Untitled10_캔버스에 유채_140 110cm_2000

 

곧 주말이 다가오네요. 금요일 이 시간엔 이상하리 만치

밀려드는 일이 없는 탓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게 되네요.

페티시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을 찾는 일, 그것도

제대로 균형잡힌 내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대상을 찾는 일이 시급한 때입니다.

한국사회는 탈법과 불로소득, 부동산투기란 정신적 광풍을 다시 불러

내려고 '신자유주의'란 주술사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전상옥의 그림에선 '소비주의에 쩔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다간 영혼 전체가 물신주의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이럴때일수록, 낮아지는 법, 영혼의 낙법연습을 해야 할 때인 것이죠.

우리 스스로 마법의 주문을 외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의 모자 속에선 뭘 꺼내실 건가요?

 

브라운 아이드걸스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아브라카다브라'......주문을 외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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