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샤넬-미술관에 가다

베라 왕의 드레스엔 김연아가 있다

패션 큐레이터 2009. 5. 6. 14:18

베라 왕의 드레스엔 김연아가 있다

 

김연아는 죽음의 사자(?)

김연아에게 빠져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200점을 돌파하며 기술적, 미적 완성의 세계를 보여준 그녀만의 세계. 중력의 법칙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가 만든 섬세하고 강인한 점프, 투명한 얼음 위를 유영하며 만들어낸 대기의 흐름이 실체가 되어 인간의 동공에 맺힌다. 우아하게 사멸하는 죽음의 운명을 그려내며,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기술과 완벽함을 선보였다.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던 생상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a)는 원래 중세 시절 교황과 황제, 은둔자와 성직자 모두 죽음의 행렬 속에 춤을 추며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예술작품의 테마였다. 만물을 정복하고 평준화하는 강력한 죽음의 힘이 담겨 있다. 맞다. 김연아의 스케이트는 세대론적 단절을 만들며, 그 이전 시대, 유럽과 북미가 장악했던 피겨 스케이트의 역사를 뒤집는다. 이제 그 힘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이되었다. 김연아의 눈빛을 기억한다. 마지막 10초의 공연. 그녀의 눈빛엔 서양의 피겨를 죽음의 무대로 인도하는 사자의 강렬한 힘이 담겨 있다.

 

피겨 스케이트 박물관에서-디자이너 베라 왕을 만나다.

2000년 여름 미국여행 중 우연하게 들렀던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피겨 스케이트 박물관. 독특한 컨셉과 테마를 다루는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취재거리를 찾기 좋아하는 내겐 이 피겨 스케이팅 박물관은 규모는 작지만 매우 이색적인 곳이었다이곳은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 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물을 모아 명예의 전당에 안치한다. 제인 토빌이나 크리스토퍼 딘과 같은 피겨 스케이트의 초기 역사의 중요한 인물을 포함, 2000년대 최고의 사랑을 얻었던 미도리와 카타리나 비트, 크리스티 야마구치의 검정색 벨벳에 황금자수가 놓여진 멋진 드레스를 볼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무의식 중에 피겨 경기를 보다 보면 재차 듣게 되는 스케이트 연기에 관련된 용어들의 역사를 한 눈에 배울 수도 있다. 트리플 악셀과 살코 점프 등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피겨의 대표적인 기술을 만든 이들을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번 국민요정 김연아의 세계 피겨 선수권 대회 1등을 이끌었던 수석코치 브라이언 오서도 이곳에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 특이한 이름이 눈에 띈다. 패션 디자이너 베라 왕이 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된 걸까? 무슨 이유지? 하고 자세한 내막을 찾아봤다.

 

패션 디자이너 베라왕이 꿈꾼 세상-나도 연아처럼

 

어린 시절, 스케이트 선수로 성공하고 싶었던 그녀는 1968년 전미 스케이트 챔피언십 주니어 페어 부문에서 2번이나 참가했다. 그 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엔 <군계일학 Face in the Crowd>이란 코너에 그녀를 소개할 만큼, 그녀의 피겨 실력 또한 출중했던 것 같다. 우아한 폐곡선을 그리는 빙상의 아크로바트, 그녀 또한 아시아의 피가 흘렀을까? 차이나 쉬크(China Chic)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단다. 그러나 결국 전미 올림픽 대표팀 선발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던 그녀. 이후 패션 에디터와 디자이너를 거치며, 세계적인 피겨 선수들의 의상을 디자인 함으로써 피겨에 대한 못 다한 그녀의 애정을 풀어냈다. 두 번씩이나 올림픽 금메달을 손에 거며 쥐었던 낸시 캐리건과 미쉘 콴의 드레스는 모두 그녀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의 드레스를 그녀가 디자인한다면 어떨까?

 

베라 왕이 그녀와 만난다면

 

패션 디자이너 베라 왕은 미술사 전공자답게 미술 속에서 캐낸 패션의 코드를 재해석하고 이를 패션에 적용해왔다. 그녀가 만든 웨딩 드레스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드레스에 기초한다. 신 고전주의는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정점에 섰던 이들이 이전 구시대의 유물과 정신적 폐해와 결별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그리스 로마 시대의 반투명 시스루(See Through) 룩을 의도적으로 유행시켰다. 이 옷은 특히 공기처럼 가벼운 소재로 만들어 많은 여성들은 당시 옷의 무게를 재어 가장 가벼운 이에게 상을 주기도 했단다. 이번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가 보여준 컨셉은 죽음을 몰고 가는 사자의 역할이었다. 얼음 위에 피어난 동양의 꽃, 이제 죽음의 춤을 통해, 혁명을 일으켰다면 이제, 순수의 시대로 돌아와 동과 서를 모두 포용해 주는 투명한 존재의 모습을 가져가면 어떨까. 베라 왕에게 김연아의 드레스를 맡기고 싶은 이유다. 힘든 경제난국, 희망을 찾기가 점점 어려운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열정과 희망의 바이러스를 불어넣은 그녀. 김연아. 이제 당신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투명한 주름 드레스를 입고 우리를 다시 한번 안아주리라 난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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