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담긴 불독정신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리던 광화문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환경운동가 최병성, 서강에 터를 잡고 오랜 세월 살았던 남자. 내가 그를 만난건 산업폐기물 시멘트 건으로 블로거의 동행취재를 권하면서부터다.
장신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목자의 길을 갔어도 좋았을 이 남자. 그러나 그는 단호히 자신의 길을 버린다. 1994년 서강에 터를 잡고 자연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신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였을까.
신학에도 생태신학이란 분야가 있다. 중세부터 시작된 미 개념의 역사는 바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 설정에서 시작된다. 미를 창조한 주체와 피조물인 자연.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며 최종의 방점을 찍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성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인위적으로 미의 개념을 강요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그는 바로 인간으로서 자연과 주체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는다. 그는 환경 블로거다. 환경을 이야기 하며 우리내 생의 터우리에 맑디 맑은 생의 방점을 찍어나간다.
자연의 속살을 한꺼풀씩 벗겨내다 보면, 자연이란 거대한 매커니즘을 이루는 조형자의 논리, 디자이너로서의 신의 미적 개념과 만나게 된다. 자연 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꽃과 곤충과 숲에 대한 이야기꾼으로 변모한 그에게선, 파릇한 자연의 냄새가 난다. 흙의 순수를 알고 빗물의 비릿함과 유장한 강물의 흐름을 몸으로 받아들여 본 사람은 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교만할 수 없는 이유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러운 남자가 환경부와 쓰레기 시멘트 회사를 상대로 3년이 넘는 세월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여전히 환경부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환경에 관심을 둔 국회의원과 여타 관계자들을 온 몸으로 설득하며 정부대책을 끌어낸 그의 집요함은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글을 쓰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자칭 파워 블로거란 존재들이 등장했지만, 나는 최병성 목사만한 파워 블로거를 만난 적이 없다.
내가 그를 파워블로거라 부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집요함이다. 탄탄한 사실관계에 기반한 쓰레기 시멘트 문제로의 접근. 나는 그가 만들었다는 850페이지에 달하는 하늘색 표지의 자료집을 받고 놀랐었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환경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을까? 지금에서야 후술하는 거지만 당시 최병성님과 함께 영월지역을 여행하며 동행취재를 했던 많은 블로거들에게 실망을 했다. 그때 난 블로거 저널리즘이란 이 신종 조어의 깊이에 대해 많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하루 아침에 업체의 초대를 받아 방문을 하고 귀한 대접을 받고 온 블로거들이 최병성 목사를 흔히 하는 말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편에 서서 싸웠다.
새벽 4시 반까지 함께 동행했던 모 블로거 기자와 상반된 내용의 해석을 두고 피가 터지도록 싸웠다. 그럴수 밖에. 그날 회의석상에 내가 참석을 했고, 그 내용을 일일이 녹음기로 녹음한 내용을 갖고 있는데다, 내가 한 말까지 곡해할수 있도록 왜곡한 그 블로거를 난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글을 다 지우며 내게 갖은 욕을 하고 떠나는 것으로 논쟁은 끝을 맺었다. 이후로 컨퍼런스에서도 얼굴을 봤지만 외면했다. 사업가인 내가 이렇게 누군가와 확실하게 대립각을 세워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사건은 잊혀질수 없었다.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얼마나 사회 전체에 독소가 되는지를 배웠다. 블로그 저널리즘이란 말이 유행하게 되었을때, 그 말에 담긴 참 어설픈 블로거들의 한탕주의에도 눈을 떴다.
그때 배운것이 있다면 환경블로거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참 어렵다는 거다. 환경문제를 비판하기 위해선 단순하게 숲의 아름다움을 찍으며 몽상가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변과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통렬한 이해, 그것의 사실과 팩트를 정확하게 조율하고 환경과의 문제를 그리기 위해 화학, 생물, 지리등에 대한 연관지식의 넥서스가 필요하다. 최병성님이 편집한 쓰레기 시멘트의 이해를 담은 책자들을 읽고 또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자기 돈 들여서 연구소에 샘플 채취해서 결과값 기다리고, 그렇게 정부단체에 명확하게 지적해도 환경부는 기업이익만 대변하며 한 개인을 묵살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 뿐인가 관련 업체들의 연합체인 양회협회는 그의 블로그에 온갖 악플도 모자라 다음측에 고소를 하고 포스팅 내용도 공표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던가. 1차 재판에서 이기고 또 뒤집어 지고 그렇게 몇번을 했나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최병성님이 이겼다.
그의 글쓰기, 블로그적 소통을 불독 저널리즘(Bulldog Journalism)이라고 한 언론학자가 명명한 걸 봤다. 내가 봐도 참 괜찮은 묘사어가 아닐까 싶다. 집요함.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집요하게 달려들 때, 인간은 지금까지의 진부함을 벗고 화학적 연금술의 옷을 입은 인간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물이 끓는 비등점을 100도 라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99도에서 100도 사이에서 벌어진다. 우리는 그걸 임계치라고 부른다. 형질이 달라지는 지점. 그의 환경사랑이 불독의 집요함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의 '쓰레기 시멘트'에 대한 입장과 관점이 바뀌었다. 이것이야 말로 인식의 임계점을 넘는 아름다운 아크로바트가 아닐까?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해 겨울, 손이 파르라니 변색되던 혹독한 추위 속 일본 대사관에서 시위란 걸 해봤다. 내 인생의 처음으로 해본 시위다. 산업폐기물과 폐 타이어를 일본으로 부터 돈을 받고 사오는 나라. 그 타이어를 소성로에서 태우며 갖은 중금속을 양산하는 시멘트 회사. 그 시멘트로 지은 집은 하나같이 새집 증후군에 시달리며, 내가 소장한 그림들의 손상까지 경험해야 했다. 그런 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환경정의를 밝히려는 한 남자를 지독하게 밟았다. 거의 으깨는 수준으로. 난 참 놀랍다. 나라면 그저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은 그 모험을. 저렇게 여리게 생긴 남자가 불독처럼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다. 그런 그가 이번에 새로운 책을 펴냈다.
이번 책에선 지금까지 써왔던 블로그의 글들과 더불어 새로운 자신의 자연 속 묵상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갈무리했다. 새싹 키만큼 눈높이를 낮추면, 그때부터 자연이 보이고 아름다움이 눈앞에 현현한다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전통적 미학개념에도 이미 이런 주장들이 있다. 자연은 항상 가려져 있는 커튼과 같다. 그 투명한 물빛 커튼을 여는 것은 인간이고, 그 인간의 동공속에 비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랭이가 찢어진다고 하지만, 그 뱁새는 항상 자식을 잃고서도 자신보다 몇 배나 더 큰 뻐꾸기의 자식들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대리모의 역할을 한다. 뱁새의 아름다운 관계지향적 품에 대해 다시 배워본다.
"씨앗을 심는다고 곧바로 싹이 나고 꽃이 피지는 않습니다. 당장 이라도 꽃이 보고 싶은 우리 마음과는 달리, 씨앗은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싹을 내고 정해진 때에 맞추어 꽃을 피웁니다"
너무나 간단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빨리 빨리, 조급증에 빠져 저 자연을 우리의 욕망의 체계로, 시선으로 재단하고 조율한다. 그렇게 생장 호르몬을 놓고,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결과가 우리들이 보는 수많은 변종적 바이러스와 환경파괴가 낳은 혼돈이다. 우리가 자연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기다림과 '느림'의 미학이다.
환경 블로거 최병성의 책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시간 속에서 그가 만난 모든 자연에 관한 묵상이 편안한 문체로 녹아있다. 꽃과 수술의 갯수를 세며 자연이란 디자이너가 보여주는 완벽한 수학적 대칭성 개념도 흥미롭다.
잠자리의 커다란 겹눈을 멋진 선글래스에 비유할 수 있는 여유. 부채처럼 두툼한 더듬이가 있는 나방을 커다란 뿔을 가진 황소에 비견할 수 있는 건, 삶의 주변부를 미시적으로 바라 볼수 있는 따스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익숙함의 노예'를 벗어나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황홀을 배워나가는 것.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찾아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일것 같다. 블로거 최병성님. 요즘은 4대강 개발이라는 허울속에 진행되는 대운하 사업으로 정부와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있다. 외롭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난 그를 후자의 편자에 놓고 해석하리라. 고독하다는 것. 아름다운 것을 본 자만이, 알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간단한 진실을 배운 자의 울분과 작은 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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