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인사동에 들렀습니다.
24일에 열리는 <패션사진의 거장 사라문>展의
초대장도 건내줄 겸, 평소에 자주 들리는 한복 디자이너 외희님께
갔지요. 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장은선 갤러리에서 열리는 낸시랭 초대전을
살펴봤습니다. 전시가 시작된 건 좀 되었는데 이제서야 소개하게 되네요.
이번 전시의 제목은 <캘린더 걸>입니다.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모델로 선 사진 작품을 전시합니다.
청순한 소녀에서 지구본을 돌리며 위용을 떨치는 여왕의 모습과 테니스를
치는 핀업걸의 모습,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든 모습까지 다양한 그녀의 모습이
캘린더 걸의 모습으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핀업 걸은 40년대에서 50년대 군대 병영에서
자주 사용된 위문용 브로마이드 속 여인의 이미지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작가의 논평을 들어보면,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는 일상의 전투에
던져진 병사와 같기에, 그들에게 꿈과 환타지를 주는 핀업걸로 분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죠. 누구도 타인을 돌보지 않는 시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만든 새로운 전쟁터,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무하는
여신이 되어 있군요.
낸시 랭은 항상 우리 사회에 일련의 논란들을
만들어온 아티스트입니다.
튀는 옷차림과 행동은 말할것도 없고
자신의 표현처럼 '미술계 전체에 팽만한 엄숙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그녀가 보여주는 도발적인 생의 모습들은 많은 안티세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핀업걸 사진 작품 중의 하나인
<나는 막스를 사랑한다>입니다.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안고 모델이 된 초록빛 니트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죠.
이번 전시도 에로틱한 이미지가 많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실제로는 별로 강한 느낌의 사진은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50년대 핀업걸의 형상들을 모화한 것일 뿐이었죠.
무엇보다 이 핀업걸이란 테마를 사용한 건 낸시 랭 뿐만이 아니었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2004년에 이미 애희란
작가가 핀업걸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거든요.
애희 <핀업걸 프로젝트> 2004년
애희 <핀업걸 프로젝트> 2004년
사실 어느 시대나 대중적 위무가 필요할 때
혹은 환상에 근거한 일상의 위안이 필요할 때, 자본과 소비는
이 핀업걸의 이미지를 유포시킴으로써 싸구려 위로를 던지곤 합니다.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경제의 영역을 넘어 우리의 모든 일상을 규율하는 법칙이
되어가는 요즘, 이런 흐름을 재현하는 예술의 방식이 꼭 무거워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였을까 저로서는 어제
전시를 꽤 나름대로 무겁게, 재미있게 봤습니다.
낸시 랭에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낸시 랭이란 작가의 작품에 드러난 메세지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
그걸 표현하는 자의 행동이 다소 튀고 도발적이어도, 이 또한 표현을 위한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가져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비평 중에 '한국미술계의 엄숙주의'란 표현
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또한 모르고 있는
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이 있고, 한국미술시장을 받치고 있는 신진작가들 또한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대면하지 않을 뿐,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세상을 그리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는 그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캔버스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핀업걸로 포장하고 급조된 위안과 자본화된 사회 속의 환상을
팝아트 적으로 그려내는 이도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다양성입니다. 현대미술의
본령이기도 하구요. 작가든 방송인이든, 어떤 면에서 보면 다소 오버하고
튀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비난도 받고 있지만 이렇게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도 있다......정도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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