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무게가 알레그로로 떨어지는 일요일. 성곡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분홍빛 세상을 수놓던 화양연화의 절정은 끝나고, 미만한 연록색이 차 오르는 시간. 피아니스트 유니스 황을 만났습니다. 예전 <바람의 소리를 듣다-대관령 목장에서>편 포스팅을 하면서 이분의 In the Forest 곡을 올렸지요. 이후 블로그에 비밀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올려줘서 고맙다"는 인사였죠.
그 후 편지를 두 통 보내셨는데 전 "남자가 참 편지를 곱게 썼다"라고 만 생각을 했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성곡미술관에서 뵙자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봄빛 가득한 성곡미술관 정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카페 문에 달린 풍경소리가 맑습니다. 뒤로 보이는 무르익은 분홍빛 꽃방물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바람이 불땐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꽃비가 내리던 하루였습니다.
성곡미술관 정원은 예전 벚꽃이 필 때면 그 아래 테이블에서 마시는 커피향이 좋았지요. 이제 위층은 문을 닫고 아래에서만 영업을 합니다.
작은 시간의 알갱이같은 분홍꽃 이파리들이 땅에 떨어져 옅은 물감 풀어놓은 듯 곱습니다.
Q : 남자인줄 알았는데, 만나뵈니 여자 피아니스트여서 당황했습니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뉴에이지와 광고음악 분야에서 여성분이 활동하시기가 만만치 않았을텐데요. 언제부터 음악을 하게 되셨는지요?
A : 6살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클래식 보다는 실용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답니다. 버클리 음대에서 영화음악을 공부했고 귀국 후 다양한 제품광고 CF 음악과 게임 BGM과 영화 음악 작업을 하고 있어요.
Q :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배출된 버클리 음대에서 재즈를 공부하셨는데요. 유학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A : 별 다른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미국을 간 것이 IMF 직후에 갔기 때문에 각 과정을 빨리 끝내려고 제 자신을 좀 많이 닥달했다고 할까요. 거의 쉼이 없이 공부에 매진한 것 같아요.
Q : 영화음악과 뉴 에이지 풍의 곡들을 연주하시는데, 주로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시는지요. 특별한 방법이나 자신만의 영감을 얻는 스타일이 있다면 설명해 주세요.
A : 전시장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최근 퐁피두 미술관 전시에 다녀왔어요. 금요일에는 스튜디오에서 나와서 광화문 쪽 갤러리 거리를 산책합니다. 그림 보는 일이 즐거워요. 그냥 보는 건 아니고, 내가 왜 이 그림에 끌리게 되었나를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요즘은 걷는게 너무 좋아요. 걸으며 천천히 사물도 살펴보고, 반짝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정리하죠.
Q : 제가 개인적으로 유니스 황님을 알게 된 건 1집 앨범 Lazy Afternoon 때문입니다. 앨범을 내게 된 동기가 있다면요?
A : 특별한 동기라기 보다는 당시 정신없이 배경음악 작업을 했는데, 아카이브로 만들고 싶기도 했고, 그냥 BGM으로만 남겨두기엔 아깝다고 주위에서 말씀하셔서 앨범을 내게 되었습니다.
성곡미술관 정원에는 많은 조각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더 많았는데 숫자가 줄었더군요.
목조 바닥에 떨어진 옅은 분홍빛 잎파리들이 절정을 관통한 쇠락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Q : 앞으로 하고 싶은 스타일의 음악이 있다면요? 여쭤봐도 될까요?
A : 일러스트 작가인 다루님과 함께 작업을 해요. 따듯한 그림이 좋거든요. 저는 제가 뉴에이지 음악을 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어요. 미국에서재즈를 공부한데다, 다양한 데 관심이 많고, 장르에 묶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네오 클래식 정도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일렉트릭 라운지 분야도 좋구요. 영화음악을 한다면 꼭 로맨틱 코미디 작품을 해보고 싶습니다.
Q : 본인이 즐겨 읽는 장르의 책과 작가를 알려주세요.
A : 편안하게 읽는 책을 좋아해요. <하하 미술관>도 그래서 골랐어요. 표지 모델이랑 가장 닮은 독자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좋아하는 작가는 알랭 드 보통과 오쿠다 히데오에요. 보통의 글은 평이한듯 하면서도 담고 있는 메세지가 깊고,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는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인 힘을 잃지 않아요. 에쿠니 가오리의 쿨함도 좋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에 배어나는 묘사의 힘에 놀라기도 했어요. 이런 묘사능력은 음을 붓처럼 캔버스에 칠하는 작업과 비슷하죠.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아끼는 작품이구요.
두번째 앨범 준비를 하신답니다. 유니스 님의 생일이 있는 6월에 기념으로 발매할 예정이랍니다. 앨범에 삽입 될 곡을 미리 들었습니다. Breeze in my mind, Knock Knock Knock, 등 Maum이란 제목으로 준비 하고 있답니다. Breeze in my mind 는 이날 옥외카페의 풍경과 잘 어울렸습니다. 최근에 만든 현대 제네시스 광고 음악을 동영상과 함께 보여주셨고. 이외에도 존슨 앤 존슨, 엘지, 삼성, 맥도널드의 음악과 아르마니 티비, 현대그룹 메인 사이트 음악도 맡았습니다.
성곡미술관에서 내려오는 길, 메트로 신문사 주차장 위에 즐비하게 늘어진 개양귀비꽃이 곱더군요.
황혼의 하늘이 펼쳐진 언덕
초록 줄기에 얹혀진 붉은 단지 개양귀비꽃을 지나갈 때면
허리 다치지 않을만큼만 담긴 향 한 줌 집어 바람에 풀어 놓았다
생채기난 삶의 골짝을 지날 때에 바람의 서랍을 열어 필요한 만큼의 묘약을 꺼내어라
여린 가슴 짓찧어진 즙을 흘리고도 퍼렇게 멍든 붉은 가슴이여
여리지도 투덕하지도 않은 살집을 드러내고
그냥 피어 있기만 해도 좋은 것을
아름답기까지 한 존재가 있어
강은령의 <개양귀비 꽃을 지나며> 전문
꽂꽂하게 대궁을 세워 붉은색과 노랑색의 잎파리를 환하게 벌린
풍경이 그 아래, 좁은 길가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 위로 답답한 도시의 호흡에
약간의 여백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좋습니다.
Q : 자신에게 음악이란 어떤 것이다.....정의내려 주실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음악이 가야할 방향성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A : 음악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요. 예전엔 여러분야를 기웃거렸는데 요즘은 범위가 하나로 좁혀지고 있어요. 깊어진다는 말이겠죠. 누군가 제 음악을 듣고, 창작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어요. 텔레비전에서 양희은 씨의 노래를 들었어요.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한 구석, 폐부 깊숙히 파고드는 느낌에 사로잡혀 밤새 곡을 썼어요. 힘과 영감을 준 것이죠. 이런 곡을 쓰고 싶어요.
Q : 예술가로서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이랄까. 일종의 예술적 좌우명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는 걸로 오늘 인터뷰를 정리할께요.
A : 무엇보다도 예술인이라면 음악을 포함, 자신의 예술세계를 닮아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품 속 세상과 작가 자신의 세상이 일치한달까......그런 모습을 견지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후 정동길을 걸었습니다. 정동길은 라일락꽃 향기로 가득합니다. 구겨진 마음 풀어낸 후 발그래한 햇살 풀먹여 다린 옥양목같은 생(生)의 강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라일락 향기가 도시의 저변에 흩뿌려지는 시간.
카페 2층 테라스에서 본 풍경이 곱네요.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 영화 <클로져>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데미언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가 흘러나왔고, 유니스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라며 귀를 기울입니다.
유니스님을 만난 날 밤늦게까지 진행된 인터뷰 시간은 마치 우연처럼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히 인터뷰를 청한 한 피아니스트의 초상에서, 예전 내가 가지고 있던 일면들, 마음의 습관과 관계맺기의 방식, 시간이 지나 조금씩 변화된 내 모습이 투영된 듯한 또 다른 나를 보는 듯한 사람과의 만남.
제 블로그에 작가분들이 방문해서 글도 남겨 주시고 만남도 갖는 요즘 참 행복합니다. 블로그 공간이 허브로서 알려지고 있다는 점. 감사할 뿐이죠. 다음 인터뷰의 주인공은 소설가 공지영 선생님입니다. 유니스 황님의 In the Forest, The Memory of Hoboken, 마지막으로 데미언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를 올립니다. 유니스 님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세요. 문화의 제국에서 만나뵈어 반가왔어요. 서로 인사 나누시면 좋을 듯 하네요. 행복한 한주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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