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Education/딸을 위한 미술 이야기

그 많은 상회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미경의 <기억의 소풍>전

패션 큐레이터 2008. 5. 14. 14:23

 

어제는 부산한 하루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출판사에 들러 출간된 책을 받고, 약속한 전시회 오프닝에 참여한후

제가 활동하는 카페 모임에 가야 했지요. 삼청동길 걸어가는 길목의 교회는

언제봐도 두가지 색감이 하늘빛과 어우러져서 곱습니다.

 

 

사실은 어제 밤에 우연하게 네오룩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눈에 들어온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미경이란 작가의 그림인데

예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조그만 구멍가게들을 테마로

그린 연작들이더군요. 캔버스 위에 유채나, 수채, 혹은 아크릴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선 하나 하나를 펜으로 세밀하게 그려낸 펜화였습니다.

 

 

정밀하게 묘사된 풍경 속 구멍가게들의 풍경은

어린시절 제가 살았던 마을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 전시의 제목이 <기억의 소풍>인

까닭은 옛 기억의 단아한 시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엄마 100원만' 하던 그 시절, 그 돈만 있으면 눈깔사탕이며 아이스바를

먹을수 있던 그때는 어느 새 기억조차 되살리기 어려운 한 부분이 되어 있더군요.

 

 

작가 이미경은 강원도에서 남도 끝자락까지

아련한 기억 속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펜으로 그려냈습니다. 위에 보시는 그림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오른편 뒷골목에

있는 <석치상회>의 모습입니다. 돌부리산을 뜻하는 석치는 가게 주인인 할아버지의

꽂꽂함 만큼이나, 반듯한 초록빛 가게명판과 촘촘하게 놓여진 물건들이

그 풍경에 더해져 따스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더 큰것이 효율적이고, 더 빠른 것이 모든 경쟁의 시작이 되는

지금, 느림의 속도 위에 옹기종기 펼쳐진, 구멍가게들의 풍광은 짐짓 지쳐버린

내 영혼의 시계를 뒤로 돌려, 다시 한번 걸어왔던 길을 리와인드 시킵니다.

뒤쳐지고 바스러져가는 풍경 속에 내가 그리도 응고시켜 버리고 싶었던 기억의 형상합금은

어떻게 나를 규정하고 만들었는지, 그렇게 빚어진 내가 과연 행복한지

다시 한번 저를 붙잡고 물어보네요.

 

 

오후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간

아련함과 그리움은 아이의 손에 쥐어진 추억 속 사탕이 되고

여전히 동심이 소거되지 않은 어른의 몸을 가진

지금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은 화가가 빗금으로 정치하게 그려낸

가게들의 표면만큼이나, 정면으로 고개를 세우지 못한 채, 기울어져 있습니다.

 

 

번잡하던 도시의 풍경 속에 홀로 남겨진 소외감을

경험한 이들은 압니다.

 

 

큰 것만이, 효율성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죠

 

 

작가와 함께 떠나는 추억여행은

달콤하고도 따스합니다. 유년을 넘어 장년이 되어 버린 지금

기억의 뜨락위로 떨어지는 햇살 만큼 훈훈하고, 여전히 나는 그리 변하지는 않았음을

다시 확인하고 갑니다. 그 확인의 과정 속에서 때론 구차한 변명거리

한두 가지는 남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작가의 변을 읽어봅니다.

 

"나는 이 따스한 기운을 펜촉에 묻혀 날카롭게 그림을 그린다

가르다랗고 뾰족한 직선의 속도감이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듯, 돋보기로

손금보듯,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그려나간다. 무수히 겹쳐진 선으로 긋고 또 긋는다

서서히 시간의 흐름조차 정지해 버리고 햇살마저 고요에 젖는다.

 

수시로 드나들던 출입문의 얼룩들, 깨러진 벽돌, 혼자 서 있는 빈의자,

손길이 다을듯한 과자봉지, 구석구석의 흔적이 쏟아져 내린다.

건물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기본적인 인간의 습성에 근거한 비대칭 균형의

절묘함이 나타난다. 비틀려 있으면서도 '운'이 있고 중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우리 문화의 "덤 있는 자유, 그냥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에서 근거한다"

 

 

표준화 전략으로 지어진 수많은 거대 할인점들이

유통의 혈관들을 하나씩 장악한 지금, 이제 자그마한 가게들은

그 생계조차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대자본의 효율이 나쁘다고 평하는 건 아닙니다.

 

 

작가의 변 속에서 제가 발견하는 핵심어는

바로 '비대칭 균형"입니다. 비틀려 있되, 중심을 잃지 않는것은

그 중심의 힘 속에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편안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겠죠.

 

 

방금 산 초코파이 한 개를 한 입에 까 넣다가
멀건히 마주보는 아이한테 반쪽을 잘라주고 먹는 아이
허전한 두 손을 맞부벼 턴다
친구하고 나눠먹다니, 기특도 하지
친구 아녜요 모르는 앤데요
"아이 같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책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유안진의 <구멍가게 앞> 전문

 

나눔과 소통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이끕니다.

이미경의 <기억의 소풍>은 바로 그 희망을 찾기 위한 작은

여정이었으리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카페모임에 갔습니다.  서양화가 임옥상 선생님과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께서 오랜만에 나오셨더군요.

이번에 출간된 제 책을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어제 새벽2시까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장의 풍모랄까, 항상 실험정신 가득한 삶을 살아온 디자이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를 반성하게 하더군요.

 

최근들어 느낍니다만, 글이 요즘 정체된 상태에 있는 건

아닌지, 성찰없이 가볍게 포장된 테마에 너무 묶여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게도 기억 속 소풍이 필요할 것 같네요.

어제 출판사에서 드디어 인쇄된 책을 받았습니다.내일쯤이면 서점에 전개될것 같네요.

초조하기도 하고......결과 앞에 적요하게 내 마음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래도 고맙기만 합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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