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Education/딸을 위한 미술 이야기

망치에 새긴 조각(?)

패션 큐레이터 2008. 5. 12. 21:20

 

주말을 이용해 전시를 보러 갑니다.

오늘 소개할 작가는 박주현이란 신인 작가인데요

아주 특이한 것이 망치를 재료로 해서 조각을 만드는 분이에요.

 

 

전시회 제목은 <도구 이야기>

고래로 도구는 손의 확장으로써, 인간의 조형 행위를 돕는

수단입니다. 많은 것이 기계화 되어가고 있다지만, 결국 인간의 손을 통해

통제되고 조율되는 세계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도구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위해 사용되지요.

그렇게 인간의 삶을 위해 기다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띄입니다.

 

 

도구 중에서도 그는 망치와 낫 등을이용해

그 끝부분에 인간의 삶과 생활의 단면들을 담아내지요.

인간을 부르는 학명중에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도구란 단순하게

어떤것을 만들고 조형하는 수단만은 아닐겁니다. 도구를 제작하고 그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적 진화란 과정을 함께 창발시키기 때문이지요.

 

 

 

 작가 박주현은 이 도구의 자루, 즉 잡이를 이용하여

조각들을 만듭니다. 여기엔 부러진 망치도 있고, 이미 그 역할을 다한

헤집은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의 손길을 통해 자루 위에서 조각된 세계는

버려진 도구들이 결코 그냥 폐기되어서는 안될, 새로운 조형의

상상력을 만드는 지점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두레박을 파서 그 속에 지은 <고흐의 방>을 보니

그림 속 고흐의 방이 연상이 되면서도, 도구를 통해 만들어진 공간이라

더욱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도구적 존재,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인

인간의 사유는 그의 인식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킨 힘입니다.

망치 위에 새겨진 작은 극미의 세계에는

그 도구가 인간을 위해 베풀어준 다양한 흔적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흔히 <도구적 이성>이란 표현을 즐겨씁니다.

이성 자체가 도구가 되는 것이겠지요. 목적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일까를 찾는 이성, 기술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이성, 바로 여기에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이죠. 이것을 흔히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지배하고 개발하고 착취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로만 사용되는 머리

그 이성을 바로 도구적 이성이라 부르지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할때, 여기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척도란 바로 눈금입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여

평가하는 것, 계량화하고 수치로 바꾸는 이성은 숫자로 환원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용기와 실천은

도구로서의 이성을 통해 제압당하고,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아름다움은

거품 아래로 깊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죠.

 

 

박주형의 <실업자의 망치>란 작품입니다.

최근 모든 공정의 전산화와, 기계화, 나아가 로보틱스 산업의 발달은

이제 그 예전 도구를 만들던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고

인간의 수동 노동을 무력화 시킵니다. 경영과학이란 과학적 관리법이란 미명하에

바로 수공예적 장인의식과 구상노동의 능력을 제거한 것입니다.

 

 

도구적 만남이란 바로 이런 현상이 빚어낸 사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자본의 요구와 사물의 관계에 의해

하루에도 수차례 자신의 이용가치만을 써먹기 위한 도구로서의 만남이 발생합니다.

비인간화와 껍질뿐인 허위의식의 만남, 그 속에서 인간의 허무와 좌절감은 더욱 커집니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판별하는 도구적 관계의 극복이

바로 모더니즘 사회의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작가의 작품 속, 자신의 노역의 빗금이 아련하게 녹아든

신발을 건져내는 과정은 도구화의 바다에 이미 빠져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근대화는 두 가지 차원의 ‘합리화 과정’입니다.

중세의 미신을 이성이 이겨내는 ‘문화적 합리화(탈마술화)’ 과정,

자본주의와 관료제 근대국가 같은 ‘사회적 합리화’ 과정이 그것이지요. 물론 문화적 합리화 덕에

중세신분제와 마녀사냥으로부터 해방되지만 윤리적 정당성과 도구적 이성의 주객이 바뀌어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율성이 절대기준이 되면서 근대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대한 극복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문명의 바벨탑은 이제 그 한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인간 위에 또 인간을 세워 그 욕망의 정점을 향해 오늘도 매진하고 있지요.

 

그러나 반대로 조류독감과 광우병, 환경파괴와 같은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닌 '위험사회'가 되어 버린것

가치에 대한 인정 보다는 도구로서의 가치만을 배워온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블로그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블로그도 도구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를 밝히며, 운동을 촉발하는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블로그도

결국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의 새로운 확장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갱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시간들이

자율적인 행복과 더불어 이루어지기에, 이는 또한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속성을 포함한 채 진화합니다. 노동과 유희가 결합된 노동

가장 이상적 형태의 노동인 셈이지요.

 

 

우크라이나에 갔을때, 극미 박물관이란 걸 갔었습니다.

머리칼보다도 더 가늘게 만든 정치인의 얼굴, 바늘귀에 새겨놓은 하트 등등

새로운 볼거리들이 가득했지요. 망치의 부리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특이한 형태의 조각들을 보면서

점점 더 도구적 이성만을 기술로서 익혀가야 하는

우리들의 암울한 미래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 미래를 밝혀볼수 있는

아름다움의 힘이 다시 한번 복원되기를 바람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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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쓴 주제는 <도구적 이성과 현대사회>란 테마입니다.

수능에 가장 자주 나오는 테마더군요. 연세대 논술을 보니 미술 작품을 놓고

수능논술을 푸는 문제들이 보여 한번 써봤습니다. 앞으로 딸에게 들려주는 미술사 이야기는

이렇게 수능논술을 겸한 미술 이야기로 바꾸어 서술합니다. 네째 수양딸이 고2인지라

아빠가 열심히 써야지 약속을 해놔서 지켜야 하거든요.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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