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천국의 정원을 거닐며

패션 큐레이터 2008. 2. 14. 06:47

 

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한없이 쌓여있는 일감에

지레 손사래를 치고 맙니다만, 새벽 일찍 깨어난 지금, 여전히 마음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던 그때로 돌아가 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만 6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나도 가보고 싶었던 동유럽 최고의 미술관 에르미타주와

러시아 국립 미술관에 두번씩 갔고, 국립 장식 미술관과 일리아 레핀이 졸업한 미술 아카데미에

갔습니다. 위에 보시는 옅은 초록빛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보았지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온지 5일째 되던날, 전날 밤 공연을 보았던

마린스키 극장을 뒤로 한채, 함박눈이 곱게 내린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1920년대 러시아 아르데코풍의 카페에서

향이 좋은 커피를 한잔 마셨고, 이후 걸어서 니콜스키 성당에 갔습니다.

 

 

러시아 어로 흔히 Sad 라고 불리는 정원은 도시 곳곳에 산재합니다.

모스크바에서도 불리바르라고 해서, 도심지 한 가운데 산책을 위한 숲길을 조성해 놓은것을

보고 부러웠는데, 이곳 페테르부르크는 더 많은 공원과 정원들이 즐비하게

도시의 정경속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빙하를 투과하는 햇살을 닮은 아이스 블루빛

성당의 외벽에 그날 따라 계속 내린 함박눈이 눈 부시게 반영된

잔잔한 아름다움이 제 시야에 펼쳐졌지요. 성당 안에는 18세기의 이콘화들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고, 그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오랜동안 여행길에 나선 제 자신의 영성을

눈빛 프리즘에 비추며 성찰해 보았습니다.

 

 

성당 앞에는 작은 산책용 공원이 있습니다.

러시아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참 추운 나라의 백성은 이래서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유치원 아이들은

그저 밖에서 뒹굴며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꼭 제일 먼저 포스팅 하고 싶었던 순간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마린스키에서 공연을 보았고 화려한 비즈니스 런치와 최고급 우크라이나 식당에 가기도 했고

미술관의 광대한 컬렉션에 눈이 멀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 니콜스키 성당앞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여행은 결국 나 자신에서 출발해, 다시 또 다른 나를 향해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하지요.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균형 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밑그림을 새롭게 그려내는 과정일 것입니다.

천국의 정원에서 아이들의 웃음을 다시 담아내며, 마음 속 아직까지 유여한

영혼의 공간 속에, 행복의 집을 건축하는 일이겠지요.

 

 

아이들이 어찌나 앙증맞고 재미있게 놀던지요.

 아이들이 보여준 러시아판 시체놀이입니다. 남자 아이의 손에 쥔 장난감 총 보이시죠

제가 사진 찍으려니 마치 모델이라도 되려는 듯 그렇게 하더라구요.

 

 

고운 무늬목으로 만든 성화벽과 우아한 종탑, 미만한 하늘빛의

니콜스키 성당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꽤나 사랑받는 성당중의 하나라고 하네요.

흔히 '항해자들의 교회'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니콜스키가 항해자들의 수호성인이라네요.

 

 

모든 건축은 다성적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이야기 합니다.

러시아 여행에서 미술 못지않게 저를 사로 잡은 것이 그들의 건축양식이었고

비잔틴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다양한 건물과 집의 방식들을

살펴보는 일이었습니다.

 

성당 앞에 놓여진 작은 정원을 거닐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정원도 크게 보면 성당의 소중한 한 일부라고 말이죠.

반복되는 창틀과 종루, 기둥과 외벽의 균형

그 속에는 질서를 통해 나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인간의 겸허가

숨쉬고 있습니다.

 

 

균일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신을 향한 황금빛 아름다운 돔과 푸른 정원

그 속에 아우러지는 함박눈과 아이들의 미소가 완벽한 한채의

행복의 집을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눈은 모든 사물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그 속에서 나도 또한 단순해 집니다. 복잡하고 다단한 삶의 결들을 넘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던 그때를 뒤로 하고

내 안에서 자라는 응축된 힘의 나무들이

그렇게 나를 둘러싼 사물의 우아한 외곽선을 따라

힘차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깨어 이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함께 여행에 동참했던 4명중 저 혼자만 남아서 남은 5일 동안 페테르부르크를

지켜야 했습니다. 외로움이 가득했지만, 여행은 또 다른 만남과

풍광을 내 안의 프리즘에 각인시키며 작은 성장의 씨앗을 던져주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