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겸재정선의 그림 속 <옛 서울의 향기>

패션 큐레이터 2007. 12. 9. 01:14

 

토요일 아침, 부산하게 채비를 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남한산성에 갔습니다. 전 주일/영국대사를 지내신 라종일 총장님과 함께

산행을 했습니다. 저로서는 좋은 만남이고, 평소에 총장님의 정치철학에 대해 일견 지식은

있었으나 실제로 자연 속에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듣고

그림 읽는 CEO의 개념을 설명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역사 속 인조가 올라간 남문을 통해 시리디 못해 푸른잔설들이 쌓인

산성길을 따라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눈쌓인 풍광속에서 사물은 매우 단순한

형태로 다가오게 되지요. 처연한 청록빛을 토하며, 백설 속에서

도도함과 유연함을 뿜어내는 소나무 사이로

겨울 바람이 불어옵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시각이 첨예하게 충돌합니다.

온라인에선 특정 후보를 둘러싼 자판전쟁이 일어나고, 정견과 관점, 타인에 대한

네거티브, 단일화에 대한 요구, 결국은 두개의 핵심 세력으로 나누어

결전의 날을 준비하자는 지금의 형세는, 최근 읽은 김훈의 <남한산성>의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는 문구가 텍스트를 읽는 동안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주화파와 척사파, 한편은 대의가 생명보다 중요했고

또 다른 한쪽에선 결국 치욕을 견디고 살아내야만, 생의 영원성을 얻는 것이라 했겠지요.

 결국 제 눈에 들어오는 건 병자호란으로 �기고 파쇄된 민초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병자호란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합니다.

  

 

겨울 나목위로 내린 잔설의 무게가

하늘을 지향하고 서 있는 초록빛 노송의 의지를 꺽지 못하는 것은

그 준결함 속에 면면히 녹아 있는 생의 의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남한산성길을 따라 걷다보니 예전

영조시대 문예부흥의 주역인 겸재 정선의 <송파진도>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그린 송파 나룻터의 모습 속 오롯하게 서있는 남한산성을 보는 재미가 꽤 솔솔하지요

 

 

겸재 정선 <송파진도> 1740년, 비단에 채색, 간송 미술관 소장

 

당시 송파 나룻터는 한강의 3대 나룻터였습니다. 오늘날의 잠실대교 남단이라고 하더군요

우측에는 지금의 수어장대의 누각이 있고 좌측에는 연주봉 옹성, 성벽 중앙에

서문누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인조는 이 송파진을 거쳐 남문쪽으로 들어갔다고 하죠

그래서였나 오늘 산행은 남문쪽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오늘날의 양천구 가양동의 관청에 현령직을 얻어 갔던 1740년입니다.

아래에 보시는 압구정과 광진 나룻터 그림도 함께 그려 <경교명승첩>에 실려있지요.

 

 

겸재 정선 <광진> 비단에 채색, 1741년, 간송 미술관 소장

 현재 광진구 워커힐 주변을 그린 그림

 

그는 조선 후기의 궁정화가로서 영조의 그림 선생이었습니다.

사대부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그가 택할 수 있는 생의 이력들은

땅을 일구는 농사꾼이 되거나, 화가가 되는 것이 전부였죠. 협착한 생의 굴레들을 견뎌야 했을겁니다.

 

그에게 비친 남한산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뭐 이런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왜 그는 남한산성의 모습을 뚜렷한 선으로 부각시켜 표현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사물을 투영하는 화가의 시각에는, 풍경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

혹은 일종의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에는

삶의 영원성, 결국은 살아서 뜻을 도모하자며 임금을 설득하는

주화파의 대부 최명길이 등장합니다.

 

 

겸재정선 <압구정> 비단에 채색,

 20.2*31.3cm, 1741년 무렵, 간송미술관 소장

 

섣부른 예단일수도 있겠으나, 겸재 정선의 조부는 이 최명길과

이종 사촌관계였습니다. 당시 관계를 보면, 그의 정치적 관점은 주화파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버겹더라도 살아있기에 우리가 이곳에 있고

남한산성의 풍광들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더불어 그릴 수 있지 않느냐고 에둘러 말하는 듯 합니다.

소설 속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은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고

그 남우새스럽고 핍진했던 47일간의 투쟁과 그 속의 우리의 모습을

겸재는 펼친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재정선이 그린 <압구정>의 모습도 편하고 유연합니다.

세조 때 공신인 일명 칠삭동이 한명회의 별장이 있던 곳이지요.

‘압구정’이란 ‘친할 압(狎)’과 ‘갈매기 구(鷗)’ 곧, ‘벼슬을 버리고 강촌에 묻혀

갈매기와 친한다’는 뜻의 정자입니다. 한명회의 실제적인 삶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구정 초등학교 뒤편의 현대아파트 74동 자리라고 하네요.

 

 

겸재 정선 <목멱조돈> 비단에 채색, 23*29.4cm 1741년

간송미술관 소장

 

원래 오늘 소개하고 있는 그림들은 <경교명승첩>이란 책에 실려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책은 현대로 말하면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시화집입니다.

이 그림은 목멱산, 오늘날의 남산을 그렸습니다. 아침해가 뜨는 겨울 남산의 설경을 그렸지요.

이때 작가의 나이 66세, 강변풍경과 더불어 온화하게 자연을 바라보는 노 화가의

시선이 잘 녹아있지요. 나이가 들면 남자도 여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성찰적이 되듯

그의 그림 속 남산의 모습은 매우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겸재정선 <양화진>

 

오늘날의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의 모습입니다.

출판관계로 합정동에 자주 가다보니 괜히 이 그림을 한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 모 대통령 후보가 천주교 성지 방문을 위해 들렀던 절두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조개 합 우물 정자를 써서, 합정동이라 했지요. 과거 조개우물이 있었다고 해요

예전 양화나루의 풍경을 아스라히 그려낸 겸재의 그림 속 정신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강을 관통하는 서울풍경을 그리던 당시 겸재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관직운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원활하게 풀렸던 시절이죠.

그래서일까 그림들이 하나같이 평화롭고 편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겸재 정선 소악루(小岳樓) 간송박물관 소장


소악루는 현재 강서구 가양동 성산 기슭에 있던 누각입니다.

여기에서 악루란 악양루를 줄인 말인데요. 악양루는 중국의 유명한 동정호가 보이는

누각입니다. 중국의 시성인 두보가 악양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등악양루>란 시를 지었지요

 

결국 이 시의 주제도 전쟁 속에 나라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데요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여전히 분열되어 있는 지금 한국의 모습과 닮아있지요.

근처 산행이라도 한번 하셨으면 좋겠어요. 눈이 부신 겨울 아침이 곱습니다.

송창식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푸르른 날> 행복하세요 모두요.

 

옛날 동정호를 들었더니,오늘 악양루에 올랐네.
오나라 초나라는 동남쪽으로 나뉘어 있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있네.
친한 벗에게는 한 자의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든 이 몸은 외로운 배에 있다네.
중원엔 아직도 전쟁이라,
난간에 기대니 눈물이 자꾸 흐르네.

    달 지자 까마귀 울고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강가의 단풍나무 고기잡이 횃불이 객수로 잠못드는 나를 대하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한 밤을 알리는 종소리가 객의 배에까지 들리어 오네.

     

    http://promotion.search.daum.net/event_ucc2007/indexA.daum

    다음 UCC 어워드의 후보로 올랐습니다. 미술이란 장르를 써서

    여기에 오른게 마냥 신기하네요. 연예인, 요리, 무한도전을 안쓰고도

    후보에 올라 기쁘긴 한데, 요 며칠 Daum을 뒤집어 놓은 것이 영향을 미쳤나 하는

    생각에 좀 불편하네요. 꼴찌만 면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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