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샤넬-미술관에 가다

한글, 달빛 위를 걷다-한글이 패션을 만날때

패션 큐레이터 2007. 10. 9. 01:57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다.

자국의 언어와 그 논리, 무엇보다도 서체의 아름다움이 탄생한 것을

축하하고 우리의 역사 속에 베어있는 언어의 향기를 즐기는 날이기도 하다.

 

한글에 대하여 어떤 소재를 가지고 접근할까를 고민하다가

최근 유럽에서 한글 서체를 패션에 응용하여 세계에 알리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봉의 올봄 2007년 S/S 패션의 테마는 한글이었다.

그는 한글 서체의 미학과 아름다움에 중독되어 있는 패션 디자이너다.

그의 작업은 이제 유럽에도 알려져서 이번 프르미에르비종(세계 최고의 원단시장)에서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한글의 재발견이란 테마 하에 그의 아이디어를 빌린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패션이란 것이 내 영혼의 거푸집인 신체를 감싸는 최종의 외피로서

우리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국적 불명의 다양한 외국어가 부분별하게 프린트된

옷들을 입고, 그 속에서 식민화된 풍경의 백성으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서양미술사에서도 자신의 언어와 그 서체를 이용한

다양한 상상력을 선보여왔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흔히 서체예술, 캘리그라피란

이름으로 캔버스 위에 구현되었다. 목적과 용도, 미적인 풍모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서체를

개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언어 서체의 미적인 잠재력을 초기부터 잘 간파했기 때문이다.

 

 

2006년 파리에서 선보인 이상봉 디자이너의 작품들, 한국에서는

한글, 달빛위를 걷다란 제목으로 정식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갖기도 했다.

 

내가 이상봉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한국적인 소재를 세계화에

성공했다는 식의 견해에 의한 것은 아니다. 바로 그것은 이제서야, 우리를 둘러싼 한글이란 체계

그 랑그의 힘을 넘어, 서체라고 하는 개인의 개성과 각자의 내밀한 품성이 녹아내린, 파롤(Parole)의 체계로서

서체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언어를 사용하되

사용하는 사람의 특징에 따라, 그가 살아온 배경과 삶의 풍경에 따라, 그 빛깔과 색조와

취향에 따라 한획 한획 새롭게 창조되는 그 언어의 무궁한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 내 시골마을, 대청마루를 스쳐 지나가는 달빛을 본 적이 있다.

그 예전, 마루를 비껴가는 달빛을 아무리 쓸어내어도 대지에 반사된 그 거대한 달빛을

쓸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뿌리로서 우리를 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그를 캔버스에 그려내고, 혹은 패션을 위한 소재 위에 그려내는 작업도

바로 이러한 우리를 구성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상봉의 말처럼, 한글이 달빛위를 걷는 다는 것은

그가 디자인한 외피들, 패션 디자인 작품 하나하나에 그 거대한 달빛을 녹여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유구하나 녹슬지 않고

유장하며 긴급하지 않고, 우리 내 영혼의 볼우물을 가득 메워온

풍성한 우리들의 상상력, 그 원천인 한글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껴안아 왔는지

반성하지 않을수 없었다. 난 이상봉의 작업을 볼때마다 그래서 죄책감이 느껴지면서

한편으로 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다.

 

 

섬세하고 낭만적인 달빛을 녹여낸듯한 우리들의 서체

개별 언어 하나하나가 일종의 그래픽으로, 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동양의 호사스러움을 토해내는 우리의 한글 서체.

 

이러한 서체들이 프린팅된 텍스타일들을 볼때마다

마치 그 위에서 달빛이 미끄러내릴 것만 같다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신체의 곡선미를 감싸고 도는 바디 컨셔스

그 위를 살포시 안고 도는 우리 내 한글의 우아함이 모델이 입고 있는

쉬폰 소재의 드레스 위에서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배흘림 기둥의 곡선미와 마치 한지 위에 물을 머금고

번져가는 수묵의 여백이, 각자 물성을 유지하면서 땅의 힘에 굴복하듯

그렇게 미끄러져 가는 소재의 우아함, 드레이프(주름처리)는 동양이 가진 매력으로

서양의 텅빈 영성을 메울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듯 해서 기운이 벅차 오른다......

 

사진 속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내 대지의

가르마길, 그 봉싯봉싯 곱단하게 그어진 시골길의 정취가 현대적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 같다.

땅의 단순함을 얼르고 도는 화려한 여인의 소품, 비녀의 재발견.

 

입어보고 싶다. 그리고 걷고 싶다. 달빛 어린 가을 하늘 아래

한글이 총총 걸음으로 내 안에 들어오는 그 환희를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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