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하쿠나 마타타-케냐의 초원에서 심바와 뒹굴다

패션 큐레이터 2007. 8. 14. 18:42

 

본격적인 나쿠루 국립공원의 사파리가 시작되었다.

최근들어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이 상품으로 자주 등장하는 걸 봤는데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긴 했었다. 대 자연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동물들을 실제 눈으로 바라 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말이다.

 

사파리를 하는 동안도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그래서인지 카메라에 잡힌 대상들이 어떨때는 물안개 자욱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초록빛이 묻어나오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둡게 찍혀 나온것들도 있다.

사파리 버스는 일반 버스와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

상단부가 개폐가능하도록 되어 있고 거기에 몸을 내민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개조시켜 놓았다.

사파리 시작하고 나서 만난 가젤.....

 

 

아프리카 사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은 확대된 동물원의 형태를 띤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마음껏 노닌다거나, 유영하는 동물들이 보이긴 한다.

물론 광대한 영역에 따라 각각의 종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긴 하지만

마치 유리없는 동물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니켈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1848년 3월 여섯 마리의 물개전시로 시작된 칼 하겐베크의 동물전시 사업이

있기 전부터 동물은 인간의 포획대상 1순위이자, 식량과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아이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이국의 땅으로부터 반입된 주먹코사슴과 점보 코끼리, 북극곰과 아프리카산 앵무새는

군주의 위엄과 존재를 빛나게 해 주었다. 바빌로니아와 중국, 그리스 문명, 알렉산더 대왕의 시절에 동물들은

가족의 품을 떠나 고향을 등지고 궤짝 속에 담겨진 ‘진기한 물건’으로 권력의 무릎 앞에 당도한 것이다.

 

신분과 권력의 상징으로 우리에 갇힌 동물은 점차 화폐의 가치로 변모한다.

획기적인 고소득사업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19세기중반 무렵, 유럽은 산업시대로 거듭 났다.

급속히 성장한 산업과 신부르주아계층의 탄생은 동물전시의 새로운 장(場)을 열게 한다.

이제 동물전시는 군주의 울타리를 벗어난 공공의 재미로 재인식의 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부르주아의 감수성과 경제의 산물은 화폐를 목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을 보고 싶다는 대중의 열망에 부응한다.

여기까지는 아직 동물원은 순전히 인간을 위한 장소인 셈이다.

과학연구와 공공 교육의 특전이 있는 장소, 위락을 제공하는 장소.

이 세 가지 이유를 합당하기 위하여 더 많은 동물의 살육과 포획과 시간의 잔인함이 흘러야한다.

 

 

케냐의 사파리는 이러한 전통적 개념의 동물원에서 그리 멀리있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보호라는 차원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고, 밀렵의 위험으로 부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자본을 쓴다는 점이 그 차이다. 이번 케냐 여행 내내 스와힐리어를 조금씩 익혀보려고

했다. 그리고 배운 것은 영화 라이언 킹에 나오는 하쿠나 마타타나 심바라는 말이

실제 스와힐리어라는 점이었는데 그 뜻은 '문제없어''사자'라는 뜻이다.

 

<동물원의 탄생>이란 책을 통해서 얼마나 동물원이 무서운 공간인지를 알고 나서는

한동안 그 흔한 데이트 한번을 위해서도 동물원에 간적이 없다.

 하겐베크 동물원의 포획방식은 간단하다. 특히 어린 코끼리들을 잡고 나서는 반드시

그 부모를 죽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살장면을 기억한 새끼는 평생 슬픔과 공포속에서 살아가는데

이런 동물들을 모아놓고는 관람객에게 <동물사랑>을 외치는 것이 지금 동물원의 모습이다

 

 

예전에 사진을 전공하던 친구가 찍은 사진 한장이 생각났다.

제목이 <동물원에서의 사유>란 제목이었는데, 동물원에서 얼룩말의 뒷모습을 찍고나선

답답한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고 했다. 그 당시 친구는 어려운 갖가지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사진 속에 투영된 것 같다며 내게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사파리는 동물들의 자연 스런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먹이사슬이 연출되는 장면도 운이 좋다면 볼수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즐기며 촬영을 하는 것은, 먹이사슬의 가장 정점에 있는 인간들이었다.

자연을 통해 신의 섭리를 어쩌고 하는 식의 논리는 우습다.

유리 동물원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형상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자본주의의 팽창사와 제국주의의 발전사와 맞물려 있다는 저자의 말이 떠오른다.

 

 

왜 자연이라 하겠는가

스스로 자에 그러할 연....이다. 스스로 있는 것.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것이다.

그 풍경에 개입한 우리들이 한 것이란, 그들을 포획해서 눈의 즐거움을 느낀 것 이외에는 없다.

처음 사파리를 시작할때 마구잡이로 신기함에 젖어 셔터를 눌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왠지 답답한 마음들이 속에서 퍼져나온다.

 

 

전망대가 있는 힐에 올랐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나쿠루의 정경이 아련하다.

광대한 땅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 속 엉겨 있던 감정의 타래들이 해결의 장을 향해

풀려갈것만 같은 환상에 젖기도 하고, 수평선이 끊없이 이어지는 땅의 경계에서

내 작은 영혼의 상처를 위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장관을 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인공적인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사파리지만

그 광대함에 놀라고, 방대한 규모에 소스라칠때쯤, 여전히 그곳에서도 생명은 계속되고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연결시켜온 그 생명의 서클들은 지속되고 있음을

배우고 또 배운다. 우리가 저 광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음은 우리의 남새스런 생명이

지속되고 확장되는 숭고의 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바다를 놓고 산을 깍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숭고함에 대하여> 중에서

 

 

 

우리를 넘어서는 존재, 저 방대한 자연 앞에서

외쳐본다. 하쿠나 마타타....이게 무슨 뜻이냐구? '문제없어'라는 뜻이라고 앞에서 밝히지 않았나!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압력과 행태들, 부조리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픔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면, 자연 앞에서 조용히 묵상을 권한다. 그러면 좀 더 담담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난 발견한다. 저 아름다움을 지은 힘들의 장난감이 된다 하더라도

난 참 행복할 것만 같다고, 그 속에서 저 청신한 푸르름과 연결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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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으시는 곡은 영화 라이언 킹에 삽입곡
Can't you feel the love tonight 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부족한 내 자신을 널어 말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삶이 힘들때마다 외쳐보세요. 하쿠나 마타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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