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빛으로 그린 그림

시간과 놀다-손영애

패션 큐레이터 2004. 9. 2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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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애 사진, "시간과 놀다"에 대하여

시간이 상대적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아인쉬타인에 이르러 명백해졌다. 물론 1919년 영국 원정대가 서 아프리카에서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증명한 것이 1차 대전 후 오차였던 것으로 재 발견되기는 했으나(시간의 역사 64쪽, 스티브 호킹 저, 현정준 번역, 삼성출판사), 그러나 시간은 혹은 빛은 이제 절대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때론 휘기도하고, 또 때로는 역류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질량이 서로 다른 물체를 전제하여 내려진 결과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인류가 가지고 있던 진리의 문제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술사 안에서도 시간에 대한 표현은 셀 수없이 많다. 특히나 살바도르 달리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시간에 대한 표현이 매우 적극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예컨대 시계를 탁자 모서리에 위치시켜 구부려 표현한 것이라든지,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 끝을 단순한 선으로 표현한 것 등은 최근에 이르러 예술가들이 느끼는 또 다른 의미의 시간관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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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있어서의 시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다른 매체가 시간을 사유로서 해석해 내는데 비해 사진은 그 자체가 이미 사진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에 더욱이나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진다. 아주 고속의 셔터로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시키는 힘이나, 반대로 아주 느린 셔터로 그 움직이는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힘은 여타의 다른 매체가 보여줄 수 없는 시간성에 밀착된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사진가들은 이러한 사진의 시간성을 중요한 문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시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시간을 조작하는 것이다.

지금, 손영애의 사진에서 보이는 시간의 문제 역시도 이러한 범주에 다름이 아니다. 느린 셔터스피드를 이용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하고, 혹은 사라지기 직전에 정지시키기도 하는 이러한 사진어법은 물론 손영애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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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는 '오토 슈타이너트의 보행자' 사진으로부터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사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박홍천의 앨리스에게' 그리고 '유수정의 사진 그 반 사진적 시각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천착해 보았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시간의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한 관심으로 남아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죽음의 문제 때문이고, 다른 편으로는 사진가가 태생적으로 가지게 되는 시간 개입의 힘 이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죽음을 예비하게 한다. 인간이 종국에 이르러 맞게 되는 죽음을 대비하는 방법은 살아가면서 그 죽음을 여러 번 가체험(假體驗)하는 것으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경로로 죽음을 선체험(先體驗)하게 하는 그 절차를 통해 죽음과 친숙해 지는 것처럼, 사진가는 사진 속에서 사물의 형상을 해체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가체험한다. 그리고 더불어 그러한 시간을 조절하는 힘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를 통해 사진가는 유희하게 된다. 즉, 시간에 개입하는 원천적 힘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손영애의 사진에서도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작가는 시간과 놀이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뒤로 보이는 배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앞을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자취를 때로는 지우고, 또 때로는 부분만 취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새롭고 구성해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다. 잘 들여다보면, 작가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진 안에서 시간과 유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반원 모양의 시계 탑 앞을 지나는 저 노인을 그 탑 앞에 저렇게 절묘하게 정지시켜 명확히 보이는 시계탑과 인물과 그 인물이 지닌 지팡이를 수직의 구성으로 정착시킨 사진을 보노라면 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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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호킹이나 칼 세이건에 따르면, 약 300억년 쯤 후에는 팽창하던 이 우주가 다시 수축을 시작하게 된다. 하여, 그 만큼한 시간이 흐른 후 인간은 마치 영화 필름이 되감기를 하는 것 마냥 무덤으로부터 어머니 자궁에로 이르는 거꾸로 된 삶을 다시 한번 살게 된다고 한다. 오랜 시간 후의 일이니 긴장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로 인해 시간을 다시 생각해 볼 여유를 갖는 것처럼, 이번 손영애의 사진을 통해 우리 앞에 주어진 사물들과 그 사물들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한 시간의 개입이 얼마나 우리를 낯설게 해주는지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다.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고, 흔들어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어디 어떤 것에고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타인의 개입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작가 손영애는 이 세계에 어떤 방법으로 다시금 개입하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