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미술 속 레즈비언을 찾아서

패션 큐레이터 2006. 7. 26. 00:39

 

 

 

 

프랑수아 부셰

주피터와 칼리스토,1760

캔버스에 유채, 월레스 콜렉션

 

오늘은 다소 특이한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바로 미술속 동성애 시리즈 중 '레즈비언'의 이미지에 대해서

서양미술 속 드러난 이미지들을 읽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합니다.

사실 동성애, 그 중에서도 레즈비언이 미술 속의 소재가 된 것은 아주 오랜 전 부터입니다.

현대처럼 동성애가 일종의 정치적인 세력화를 이루지는 않지만

예전부터 동성애, 특히 레즈비언이즘은 남성들의 환타지로서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엿보기의 방식으로 존재해 왔지요.

 

로코코 시대의 화가 부셰의 '주피터와 칼리스토'란 작품을 보시면

두명의 아름다운 여인만이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오른쪽 흰색의 드레이프 드레스

를 입은 여인은 사실 여인이 아니라 남신 주피터입니다. 칼리스토는

다이아나를 추종하는 처녀였고 그런 그녀를 위해 주피터는 다이아나로 가장하여

그녀에게 성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지요.

 

 

퐁텐블로 에콜

'가브리엘 데스트르와 여동생' 1592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미술관, 파리

 

이 작품....개인적으로 루브르를 수도 없이 가보았지만 갈때마다 한번씩

이 그림 앞에 서서 웃어보기도 하고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매너리즘 화풍의 화가중 퐁텐블로파의 화가가 그린 이 그림에는 은연중에

레즈비언에 대한 의미들을 그대로 표시합니다.

한쪽 유두를 살짝 꼬집는 이 여인은 가브리엘 데스트르, 헨리 4세의 정부였던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의 여동생의 젓꼭지를 꼬집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에로틱한 이미지를

창출하는데요. 동성애 코드로 보일수도 있고, 최근의 해석에 따르면

여동생이 자신의 남편에게 집적대자 경고의 의미로 이렇게 했다고도 하네요.

 

이브생로랑의 광고 작품' 가브리엘 데스트르의 패러디'

 

이 사진작품은 위의 가브리엘 데스트르와 여동생의 그림을 패러디 하여

제작한 광고 이미지 입니다. 단지 성의 치환, 즉 여성이 남성의 젖꼭지를 꼭 집어내는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냄으로서 남성 위에 군림하는 여성의 강인한

에로틱한 섹슈얼리티를 그렸다고 볼수 있지요. 그냥 유쾌하게 한번 보시면 될듯 합니다.

 

 

 

타마라 드 렘피카

소녀들 1940

 

개인적으로 타마라 드 렘피카가 요즘 한국에서 뜨더군요. 이 작가의 화집이

타센에서 싼값에 유포되면서 사실 이 작가의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가 많아 졌습니다.

예전에 이 분의그림을 미술관에서 보고, 참 특이하다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그림 하나하나에 왜 그다지도 성적인 어필과 에로틱한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요. 사회학자들이 흔히 소비사회의 이중적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들이라고 평하기도 하는 렘피카의 그림은 사실 미술사가들 보다

문화연구를 하거나 소비연구를 하는 분들에게 더욱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의 이 화가는 사실 양성애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속엔 레즈비언과 호모섹슈얼리티가

서로 접합되는 양성애적 이미지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지요

 

 

 

렘피카의 목욕하는 여인들

 

러시아 출신의 법관과 결혼했던 그녀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와중에서 파리로

망명을 합니다. 이후 타마라 드 렘피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을 공부하고 이후

자신만의 대담하면서도 독특한 스타일을 키워가면서 아르데코 미술의 모던한 느낌이

물씬 드는 그림들을 그려냅니다. 그의 그림은 평론가들에 의해 흔히 부드러운 큐비즘의

후예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실 그림 속 이미지들이 각진 큐비즘, 입체파의 영향이

드러나긴 합니다. 이성애가 규정된 일종의 힘으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실 양성애나

레즈비어니즘은 아직까지도 소수자의 몫이고 목소리일 뿐이지요.

 

페미니즘 운동권에서도 사실 이 레즈비언의 존재는 그리 주목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었던 이들에게

렘피카의 그림은 아주 시원한 물꼬를 턴 셈이지요.

 

 

 

타마라 드 렘피카

두 친구 1923

 

렘피카는 그림을 완성할때 꼭 자신이 해왔던 누드 스터디를 꼭 작품에 원용하여

과잉된 상태의 유혹과 욕망의 형식들을 보여주는 습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문화적인 접근의 수준을 넘어

사회적인 포용을 위한 일차적인 접점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원화 되는 사회에서

욕망과 그 제어, 혹은 드러냄은 아주 주요한 테마가 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렘피카의

작품은 아주 좋은 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