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메릿 체이스(1849-1916)
'브룩클린 네이비 야드' 1887,캔버스에 유채
브룩클린 미술관, 뉴욕
오늘, 봄빛은 황사에 가려 흐릿한 풍경의 실루엣을 보입니다
이런 날은 가방을 싸서 어디든지 가고 싶습니다. 내 안의 섬을 향해, 내가 만들어 놓은
과녁을 향해 달려가고 싶습니다. 갈아입을 몇벌의 옷과, 일용할 양식과, 눈물 흘릴때 삼키고 싶은
소금 한줌...그렇게 챙겨서 말이죠. 겨우내 생채기가 이제 치유되나 싶더니 황토빛으로 흐려진
풍경은 봄의 스잔함을 더욱 키웁니다. 어머니가 재워준 달콤한 모과를 꺼내
따스한 찻물 부어 가까운 근린의 공원이라고 가야 할까 봅니다.
오늘은 미국의 인상주의 세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리 캐사트, 프레데릭 차일드 하쌈의 인상주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것이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만큼 시중 서점에 나와 있는 미술관련 책들이
주로 유럽중심이기에 미국의 인상주의는 그만큼 새로운 느낌은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파스텔톤의 색채가 빛나는 작가 윌리엄 매릿 체이스의 인상주의 그림들을 살펴봅니다.
작은 호흡들을 모아....이제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윌리엄 매릿 체이스
'도시의 공원' 1886
캔버스에 유채, 34.6* 49.9"
시카고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윌리엄 매릿 체이스는 인디아나의 윌리암스 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행과 미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가족들이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한후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요
이후 뮌헨의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7년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화풍을 익히게
됩니다. 그후 1878년 뉴욕에 돌아와 ' 학생 예술가 연맹'에서 교편을 잡게 되지요
그는 미국에서 파스텔 화가 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롱 아일랜드의
신네콕 미술학교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후 그는 뉴욕 아트스쿨과
펜실베이나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향후 미국의 미술을 이끌어간
작가들, 가령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였던 '찰스 디머스와 마스덴 하틀리'
그리고 페미니즘 작가 '조지아 오키프'등을 키워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지요
위의 그림은 바로 그가 미국의 인상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는 기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그는 뉴욕에 스튜디오를 세우고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하는데요
바로 '공원의 풍경'들을 주로 초기에는 담아냅니다. 밝은 빛깔의 팔레트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붓터치, 즉각적인 풍경을 현장에서 포착하여 '응고된 시간의 순간'들을
그려낸 그의 미국식 인상주의 작품의 시작이지요. 장소는 뉴욕의 브룩클린에 있는
톰킨스 공원, 바로 그림 속 화면의 구성을 가득매우는 것은 공원의 널찍하면서도
직선으로 그려진 산책길들, 이 풍경아래 펼쳐진 녹지공간들을 그는 그리게 되지요.
프랑스나 미국이나, 인상주의의 발흥은 산업의 중흥과 급속한 도시화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로 이러한 도시속 풍경은 이제 근대화와
도시의 발전이란 미명아래 우리가 잃어가는 '목가적 우아함'의 새로운 대칭물은 아닐까 합니다.
윌리엄 매릿 체이스
'보육원' 1896 , 캔버스에 유채
브룩클린 미술관, 뉴욕
이 그림은 좀 많은 설명이 필요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읽어보기 위해 여러분께 설명드려야 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플라뇌르'라는 단어인데요. 이 말의 뜻은 '빈둥거리며 놀기'
혹은 산책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미술에서 사용될때 특히 인상주의 미술에
대해서 사용될때는 정확한 관찰의 풍경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관찰은
다소 정서적으로 한발자욱 떨어져 시선의 대상으로 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 당시 상업의 중심지로 세계의 온갖 이목을 끌어가는 뉴욕의 풍경 뒤로
바로 소외된 고아들, 이 아이들의 풍경을 그는 처연하게 거리를 두며 그려냅니다.
원래 '플라뇌르'라는 단어는 샤를 보들레르가 '근대생활의 풍경'이란 책에서
썼던 말이었는데요. 그가 이 단어를 차용할 당시에는
바로 인상주의가 갖는 이러한 '거리감'이 바로 근대성, 모더니티의 위기
를 그 내면에 표현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의사소통의 부재
바로 작은일은 큰것처럼 부풀리긴 하지만, 정작 내 앞에 풍경에 대해서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죠.
윌리엄 매릿 체이스
'공원의 오후' 1890, 캔버스에 유채
브룩클린 미술관, 셰인 콜랙션, 뉴욕
이 그림도 위의 공원 풍경에서 보였던 브룩클린의 '톰킨스 공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폰 킹스 공원(Von King's Park)로 알려져 있지요.
이러한 그림의 배후에는 증가하는 도시의 성장 속에서 불확실성과 소외에
놓여진 사회계층의 미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적 인상주의가 바로 사회적
발언의 형태로 새로운 옷을 입게 되는 것이죠. 그는 매우 보수적인 소재를
아방가르드적 형식언어를 통해 해석하고 그려냅니다.
즉 그것은 이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플라뇌르'가 갖는 정치적 의미이기도 하지요
귀족들은 예전 자신만이 향유하던 공적 영역으로서의 '공원'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보통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고 유한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회적 교차점의 장소가 되어가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도시속 문명화 과정을 통하여
일상화된 상업적 풍경 속에 내재된 문화적 의미의 겹을 드러냅니다.
윌리엄 매릿 체이스
'야외에서의 아침식사' 1887
캔버스에 유채
브룩클린 미술관, 뉴욕
따스한 아침햇살 아래 해먹에 누워있는 여인과
하얀 테이블천이 씌워진 목재 식탁, 뒷뜰에서의 풍경은 안온하고 멈추어진 시간의
힘을 그대로 간직한듯 그렇게 평안한 하루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대도시의 발전과 그 속에서 느껴야 하는 인간의 소외감의 깊이가 커질수록
그들이 오로지 녹지 위에 앉아 편안한 시간을 보낼수 있는 것은
저 작은 퇴청마루와 뒷뜰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상주의 그림들이
흔히 있는자들, 유한계급의 레져와 한가한 시간 속 그들의 '놀이'를 표현한다는 말은
마냥 동감할수 있는 요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우연한 풍경 속, 그 배후에 감추어진 불확실성에 대해서 인상주의는
새롭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매릿 체이스
''나한테 말한거야?' 1897
캔버스에 우채 38*43"
필립스 미술관, 버지니아
그의 사후 미국의 저명한 미술 콜렉터였던 던컨 필립스는 화가가 그렸던 '실내풍경'을
가리켜 '즉각적인 매력 혹은 직계가족들의 행복한 풍경'이라고 명명합니다.
그것은 단지 사물의 표면에 반사하는 빛의 반응 이상으로 마호가니 빛깔의 테이블과
단단해보이는 목재로 지어진 마루. 이 모든 것들이 오랜동안 잊혀져왔던
귀족풍 집안의 안온한 근엄성과 위엄을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화가는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적이면서도
스토리텔링이 있는 그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위의 그림에서만큼은
그 예외가 발견됩니다. 가족들의 친밀한 시간의 겹들이 '한편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하나같이 향수에 어린 특질을'
드러내면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이 풍경의 일부가 되게 만듭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바로 화가의 첫째딸...앨리스, 열살의 소녀는 화사한 러프의
드레스와 황금빛갈의 머리띠를 하고 신 고전주의 풍의 의자 위에 앉아있습니다.
아빠의 작품이 있는 스튜디오에서 그녀는 그림을 가리키며 " 아빠 이렇게 포즈해요"
라고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속 풍경은 너무나도 부유한 가문의 행복한 순간을
그린 것 같아 보여서, 사실상 이 당시 화가가 처했던 금전적인 어려움을 깜쪽같이 속이고 있지요
윌리엄 매릿 체이스
'그림책을 읽는 앨리스' 1890
캔버스에 유채
조슬린 미술관, 오하이오
이 당시 화가는 스튜디오를 팔아야 했을 만큼 상황이 좋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사실 인상주의란 것이 당대의 고전주의 풍의 그림들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도 '귀족의 사회적 질서'를 드러내는 것과는 영 딴판의 그림은
그들의 기호가 되질 않았지요.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는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며 이 아름다운 집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합니다.
윌리엄 매릿 체이스
'스튜디오에서' 1897
캔버스에 유채
브룩클린 미술관, 뉴욕
그의 작품 후기에서 계속된 정치적 발언과 의미들은
사실 고답적인 뉴욕의 콜렉터들에겐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가 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인지 점점 더 미술로 생활을 꾸려가는 일이 어렵게 되고
그림 속 빅토리아 풍의 귀족적인 집과 그 내부에서 보여지는 아이의 행복한
시간은 말 그대로 '시간속에 걸린 순간'으로 되고 마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오래전, 브룩클린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때는 그림 속 주인공이 마냥
행복해 보였습니다. 초록빛 러그 위에 놓여진 마호가니 빛 의자
그 위에 앉아 멋드러지게 도판을 읽어내는 아이의 모습이 꼭 미래에
제가 딸에게 선사하고 싶은 풍경이었거든요.
윌리엄 매릿 체이스
'바닷가에서' 1892 캔버스에 유채
20 x 34 in. (50.8 x 86.4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에서 이야기했듯 1891년 체이스는 롱아일랜드의 신네콕의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그 이듬해 그의 가족은 여름을 보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는 미술전공 학생들에게 야외수업을 오랜동안 진행했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은
이 당시 롱 아일랜드 해변의 풍경들을 잡아낸
그의 '외광파'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지요.
윌리엄 메릿 체이스
'계절의 끝' 1891
캔버스에 유채
버틀러 아트 갤러리, 캔사스
롱아일랜드 비치에서, 이제 여름의 끝에
한 여인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던 의자들과 테이블들이 바지런 하게 정리된
바다를 바라봅니다. 곧 초가을의 시간이 다가오겠지요.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이제는 상념의 바다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항상 계절의 끝에서는
지나간 시간들의 앙금들이 문득 문득 내 감각의 옷을 찟고 튀어나올 때가 있으니까요
언제부턴가 내 안 깊숙이
유리바다 출렁인다
하늘과 맞닿아 늘 설레는 곳
밤새
내려왔다가 오르지 못한 뭇별들이
은방울 마구 흔들어댄다.
실비단 바람 휘감겨오는 바다에
수묵화로 번지는 거대한 숲,
파도 소리에
맞추어 새들 깃들고
갯내음에 취해 나지막이 피어난 해초들 사이로
갈매기떼 한가로운 봄날 오후
뻘밭에 누운 길이
가까워 올수록
섬은 점점 멀어지고
초록은 짙어온다
하늘빛에 붙잡힌 바다를 두고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봄바다 울울리
푸른 숲에는
봄햇살 나른하게 몸 풀고 있는 ...
당신의 유리바다는 지금 햇빛사냥 중!
-누가 유리바다에 초록 발자국을 찍는가- 이소연
윌리엄 매릿 체이스
'햇살과 그늘', 1889, 캔버스에 유채
65 1/4 x 77 3/4 inches
조슬린 미술관, 오하이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한 여인이 해먹에 누워 마치 듣기싫은 잔소리를
피하려는듯 고개를 돌리고 누워있고, 정장차림의 한 남자는
그런 여인을 향해 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햇살과 그늘'...뭐랄까 은유적인 제목이 아닐까
합니다. 이 그림속 주인공은 바로 화가의 친구인 로버트 블럼, 아마 시인일겁니다.
원래 이 그림은 네덜란드이 잰트부르트에서 그려진 그림이에요.
이 그림은 사실 작가의 화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바로 인상주의적 화풍의 관찰과 빅토리아 시대의 '스토리텔링'이 합류하는
그림의 시초입니다.
원래 이 그림의 원제는 '말다툼'입니다. 딱 그대로 화면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제목이지요. 대신 작가는 은유적으로 두 사람의 이미지를
햇살과 그늘'로 명명함으로써 두 사람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이원적인 모습들을
그려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떠세요? 토요일도 오후로 접어듭니다.
봄비가 조용히 살포시 내려앉는것이 왠지 마음도 조금은 무거워지는 것 같다면
체이스의 그림속 산책하는 여인들의 풍경과 함께 많이 가벼워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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