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상에 대한 시각적 재현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다. 우선 일상에서 이미 친숙하고 평범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자신이 포착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무의미)에 대한 주관적 재현(再現)과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재현 대상이 특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반사되는 감정이 일반적인 감각으로부터 길들려진 앎(문화적 코드)의 체제로부터 언급되는 객관적 진술(陳述)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술적 행위는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주관적 재현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술은 재현 대상이 가지는 객관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그것으로부터 반사된 작가의 개인적 감정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는 가장 오래된 예술적 재현 방식이고 적어도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갖는 감정”에 대한 진솔한 재현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자연의 친화적 감정으로부터 자연의 다양한 형태들을 포착하고자 한 인간의 재현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킨 것은 우선 지형학적 방법에 의한 자연의 한 부분을 묘사하는 행위 즉 전통적인 풍경화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때 풍경화는 누구나 공감하는 공통된 감각을 진술하는 풍경이 아니라 사실상 작가 고유의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재현된 “예술”로서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진술 장치인 사진이 출현하면서부터 이와 같은 풍경에 대한 예술적 개념은 점진적으로 대상의 절대적 복사 개념으로 이동하였다 : 19세기 사진 발명 당시 사진과 풍경과의 관계에서 당시 야외촬영을 허락하는 사진술도 문제였지만 초기 풍경 사진들은 대자연의 예찬을 위한 재현 매체가 아니라 실용적인 관점에서 시각적 기록을 위한 활용도구로 간주되었다.
얼마 후 프랑스 각 지방의 교역과 풍물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기능을 위해 만들어 진 우편 엽서에 그 지방의 풍경과 풍물을 소개하는 사진이 활용되면서 풍경 사진은 전통적 풍경화를 모델로 하는 사진의 픽토레스크(pictoresque) 스타일로 보편화되었다. 그후 이러한 스타일은 거의 사진의 전유물이 되었는데 사실상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내면적 재현보다는 대중과의 공통된 감정의 교감을 위해 고착된 사진의 재현 대상(판박이)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풍경 사진들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산수화나 풍경화에 익숙한 대중의 눈에 “예술적” 이미지로 각인 되어 가장 대표적인 사진 예술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것들을 모두 “예술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비현실적인 경험과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이 투영된 풍경 사진들은 언제나 위대한 예술의 절정이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볼 때 대부분의 풍경 사진들은 흔히 달력 사진에서 가질 수 있는 획일화 된 공통된 감정의 공명 즉 명백한 문화적 코드(판박이)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사진은 근본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작가의 주관적 감정과 의도에 대한 직접적인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 진술 장치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러한 절대적 진술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내적 재현이 아니라 가장 대표적인 앎의 진술(스투디움)로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사진으로 나타난 엄청난 풍경들은 그 예술적 가치 이전에 사실상 우리의 무감각 속에서 단지 장소(site)의 진술로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경 사진에 우리는 쉽게 예술이라는 라벨로 평범한 것들로부터 구별하려 하고, 또한 예술 사진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자연 대상(이미 코드화된 절경)을 촬영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아무리 위대한 대자연의 장관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내적 경험 예컨대 명상의 “도달”(대부분의 경우 거의 신비적이고 초월적인)에서가 아닌 단순한 앎의 감동에서 찍혀진 사진은 지표로서의 창작이 아니라 상징으로서 코드의 확인이다. 이러한 오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술적 가치를 언제나 재현 대상 그 자체에 부여하려는 대상론적이고 의미론적 맹신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오늘날 사진 정보 홍수 시대의 무감각과 무감동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의 무관심에 대한 역설적 폭로가 여기 보여진 작가 이병창의 사진 작업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어떠한 정보도 누설하지 않는 작가의 계곡 사진들은 언 듯 보기에 무릉계곡을 상기시키는 대단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미지들은 흔히 이런 종류의 사진에 있을 법한 현장의 특별한 자연 경관, 인공물의 부조화, 생태계의 환경 보존과 그 고발 정신 그리고 어떤 사회적인 이슈마저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진 자체에서 아주 특이하고 이색적인 볼거리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관광객이 찍어온 기념사진이나 생태계 자료 사진처럼 사실상 문화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너무나 친숙하고 진부한 이미지 다시 말해 전혀 예술적이지 않는 자연의 대상과 어딜 봐도 푼크툼이 없는 무광의 밋밋한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의도적으로 기획된 일종의 박제된 예술품 즉 판박이 사진들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예술적”이라는 라벨을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예술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계곡 풍경들은 전통적인 예술적 관점에서 전국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예술적 재현 대상임과 동시에 오늘날 가장 분명한 판박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베허 부부가 그들의 유형학적 사진에서 철저히 도시의 예술적 서정미를 제거하면서 단지 중성화되고 도식화되고 자료화된 이미지만을 보여주듯이, 작가는 자신의 풍경사진에서 모든 예술적 측면을 철거시키면서 의도적으로 사진 예술로 위장된 판박이 풍경을 보여준다.
거기서 작가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통적 예술의 상징인 계곡 풍경이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재현되었을 때 예술과 판박이의 경계를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사진 예컨대 달력사진의 “박제된” 예술에서 예술로서의 풍경사진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교묘히 들추어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가의 사진들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서 풍경에 대한 의문이고 또한 개념적 측면에서 오히려 자연과 함께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자연과 예술에 대한 철학적 진술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감동에 대한 파토스임과 동시에 예술을 전복시키는 사진적 역설이다.
이경률 (사진비평)
출처-사진사랑
오늘은 정신없이 바쁜 하루 였습니다. 중동과 유럽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라 사실상 이 지역에 대한 연구와 리서치 무엇보다도 전략들을 입안하는데 최근의 모든 시간들을 다 투자하고 있지요. 개인의 숨결이 들어간 작가론을 써보겠다는 작은 결심들은 시간의 사금파리 속에서 마멸되어 가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들으시는 곡은 천상의 목소리 샤를롯 처치가 부르는 The Water is wide 입니다. 깊고 푸르게 흐르는 물의 움직임속에서 우리의 생이 되돌아가야할 길을 찾을수 있는 현명함을 가져보기를 바래봅니다.
'Art & Healing > 빛으로 그린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톡홀름 블루스-미케 베르크의 사진 (0) | 2004.05.09 |
---|---|
Heal the World....우리 안에 있는 희망 (0) | 2004.05.08 |
서울-나의 우파니샤드 (0) | 2004.05.03 |
춤바람에 대한....기억 (0) | 2004.04.30 |
잃어버린 꿈의 지도를 찾아서 (0) | 2004.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