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립미술관에서
제주 도립미술관에서 시민교양강좌가 열리고 있습니다. 미술과 다른 영역들과의 융합을 모색하는 강의들이더군요. 미술과 과학, 천문학, 심리학, 패션, 세계사의 결합된 지식을 알리는 강의였습니다. 패션 부문을 맡아서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독서클럽 다빈치의 조찬 강의를 마치고, 공항으로 직행해서 바로 제주로 갔네요.
이 맘때의 제주는 항상 옳아요. 시원한 가을과 순정품의 햇살이 미술관의 물빛 표면 위로 어루숭 거릴 때, 미술관에서 하는 기획전시도 보고 강의도 했습니다. 여기 강의는 책상 위에 하이라이트 조명이 고정 되어 있기에, 강사가 일어서서 강의하지 않아도 되더라구요. 예전엔 꼭 스탠딩 코미디를 하듯, 무조건 서서 했는데 앉아서 하니 힘들지도 않고요. 더 열심히 목소리를 내서 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객석에 가득찬 사람들을 보면 항상 기대와 함께 '내 입술에 막힘이 없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끝나고 인사들을 하시는데 '월말 김어준 잘 듣고 있습니다' 라고 하시는 분이 계셔서 놀랐어요. 이렇게 매체 하나 나가서 이야기를 해도 듣고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더 영향력있고 많은 사람들을 유입할 수 있는 매체에 가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군요. 하긴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전 어디든 가리질 않습니다. 패션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이야기 할 때면 매년 새로운 멋진 사례들이 태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티스는 색의 화가이지만, 실제로 그 색의 사용에 영향을 준 것은 패션입니다. 그가 어린시절 자라났던 곳이 바로 파리의 패션계에 다양한 직물과 부자재를 제공하던 곳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번 제주에 가서는 올해 열렸던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보았던 작품 중 패션에 대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골라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제가 눈여겨 보고 있는 한국의 현대미술작가인 차민영의 작업에 대해서도 소개를 해봤습니다. 차민영 작가님은 작품에 여행용 트렁크를 사용합니다. 트렁크의 한쪽에는 뚫린 구멍과 틈이 있고, 그 틈을 통해 이곳이 아닌 타자들의 삶의 풍경을 보여주거나, 후미진 길거리의 뒷골목을, 환승역의 아련한 감성을 녹여서 보여줍니다.
그녀에게 가방은 세계를 담고 있는 그릇이지만, 그 그릇의 표면에는 작은 빗금들이 쳐져있죠. 그 금의 세계를 통해 낯설고도 한편으론 우리 중 누구든 공감할 만한 풍경의 편린들을 보여줍니다. 작가의 트렁크는 도시의 이면을 나누어 표현하기도 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죠.
저는 패션업계가 습관처럼 하는 자칭 콜라보레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횟수를 좀 더 줄였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미술과 패션, 각자의 서사가 만나 더 큰 의미를 만든다기 보다 그냥 이벤트로 그치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서로에게 몸을 숙이며 상상력의 지점을 공유함으로써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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