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런웨이를 읽는 시간

찰스 제프리 러버보이의 옷을 생각함-2018년 S/S 컬렉션

패션 큐레이터 2017. 6. 12. 13:03



패션, 역사를 만나는 시간

"과거는 누구나 한번쯤 방문하고 싶어하는 '나라'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찰스 제프리 러버보이는 2018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제프리 러버보이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무엇보다 과거를 전유하며 현재를 혁신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5년 영국의 세인트마틴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그의 옷에는 80년대의 컬트처럼 숭상하던 클럽문화와 블링블링의 잔재가, 혹은 로코코 시대의 파니에가, 나폴레옹 시대의 엠파이어 라인의 가운, 중세말의 슬래시가 뒤섞여있다. 과거는 그의 말처럼 누구나 한번쯤 돌아가고 싶고, 방문하고 싶은 '물질의 세계'일 것이다. 한 시대를 방문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누려온 삶의 몫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온 문화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러버보이의 컬렉션은 놀랍다. 



그는 디자이너 한 개인의 창의성을 소리높여 외치지 않는다. 게다가 저명한 예술학교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는 '어떤 가치를 공고하게 밀어부치는' 이런 짓도 하지 않는다. 실제 많은 예술학교 선생들이 주창하는 논리와 방식은 서양식 전래동화에 빈번하게 나오는 '피리부는 사나이'에 불과한 적도 많았고 많은 학생들의 창의력을 자신의 생각의 틀에 묶어두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번 컬렉션은 철저하게 함께 자신과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의 협업이 돋보인 산물들이다. 재단을 위해 전문재단사인 시빌 루즈에게, 프린트를 위해서 자신의 클래스메이트였던 리처드 퀸에게, 쇼의 퍼포먼스를 위해 디렉터 테오 아담스에게 철저하게 '상상력'을 위임하고 함께 손을 잡았다. 



복식사 자체를 10년 단위로 정리하는게 점점 어려워진다. 복식사를 비롯하여 많은 미시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10년이란 단위를 따라가는 건, 10년이란 시간이 한 사회에 만들어내는 정신의 동류집단 때문이다. 이 또래집단의 덩어리가 클수록, 사회는 이들의 생각처럼 변해가고 채색된다. 현대패션은 이제 10년이란 단위를 적용하기가 점점 어렵다. 과거를 너무 빨리 소환해내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다원화된 사회는 이미 왔고, 그 속도도 너무 빠르다. 하나의 지배적 양식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수많은 국지적인 하위문화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스타일들은 경합하지도 않는다. 그냥 공존할 뿐이다. 각자 있어야 할 이유가 나름 있기에. 



패션 산업을 안전하게 유지해왔던 유행의 사이클은 점점 짧아진다. 패션이 돌고돈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그 전회의 시간들 하나하나가 '성찰'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소환하고 회상하는 것은, 그것을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맞닿아있으며, 현재에서 과거의 좌표를 새롭게 돌아보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의 값을 바꿔, 현재를 조금이라도 풍성하게 만들어 보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답게 타탄에 대한 기억도 참 재미있게 삽입시켜 옷들을 만들었다. 패션을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공부해온 이들이라면, 이번 찰스 제프리의 옷들이 LGBT 그룹이 가진 창의력을 역사와 결합시킨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비비엔 웨스트우드나 존 갈리아노도 그랬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 런던이었다. 80년대의 정치적 보수가 사회의 전면을 장악할 때도, 클럽키즈들은 기죽지 않았다. 신 낭만주의와 Kinky Gerlinky 클럽의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태어난다. 패션학교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패션 스타일링은 항상 시대의 보수성에 맞서는 배출구였다. 



패션은 항상 시대의 배출구였다. 유쾌함과 웃음으로 뒤틀린 세상의 논리를 한번쯤 거리를 두고 본다는 것. 그 자체로 시대가 맞닿드린 어둠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시대의 '바보제'였다. 디자이너 찰스 제프리의 향후 행보가 궁금하다. 시대의 보수성이 인간의 몸과 제스처를 기계적인 무의미의 세계로 만들 때, 이것과 싸울 수 있는 것은 한줌의 눈물과 전복을 위한 웃음의 광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