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영화 유스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6. 1. 25. 14:21



늦은 밤 아내와의 영화 데이트. 「유스」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대사 마디마디를 입 속에 드롭스처럼 넣고 오물거리며 복기하려고 애써본 게 언제인가 싶다. 그만큼 영화 속 대사들이 마음 한켠을 촉촉하게 적신다.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케인과 하비 키이틀, 특히 마이클 케인의 영국식 발음으로 듣는 대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영화는 내러티브의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추구하기 보다 파편같은 생의 묵상을 영화 전면에 꾸준히 삽입한다. 스위스의 고급 요양호텔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묵는 숙소답게, 정갈하고 깨끗하며, 철저하게 일대일 개인 서비스가 가능한 어찌보면 '노년의 천국' 같은 이곳은, 의외로 답답한 사회의 감옥처럼 비춰진다.




내겐 타이틀 롤의 소개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두 개의 색감으로 구획된 세계를 관통하는 붉은 선은 마치 색을 통해 노년과 젊음이라는 두 세계를 나누려고 하는듯 하다 늙음과 젊음의 두 시간대를 음악 속 대위법처럼 공존시키려는 연출의 변이겠지 싶다. 산마르코 광장을 배경으로 젊음과 노년이 서로 엇갈리는 길의 방향을 걷고 그 위로 차오르는 물의 이미지는, <그레이트 뷰티> 를 연출한 감독답게, 미장센에 엄청난 공을 들인 감각적인 연출을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물은 항상 그 자체로 생명과 죽음의 이중주를 은유하는 세계가 아니던가. 




대사 마디마디 묵상에 빠질라치면 더 큰 울림의 질문이 담긴 질의와 답변으로 연결된다. 영화 속 지휘자 프레드 벨린저의 모습에서 페데리코 팰리니의 <8과 1/2>이란 영화속 주인공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만큼 소렌티노 감독의 영상에는 자신의 문화적인 유전자로 각인된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의 요소들이 녹아 있다는 뜻이겠다. 굳이 계보를 들먹이고, 비슷한 대사와 담론들을 다룬 영화들을 열거할 생각은 없다. 뭐라해도 예전의 영화와는 또 다른, 감각적인 영상과 미장센, 가수 팔로마 페이스를 직접 출연시킬 정도로, 뮤직 비디오 같은 영상과 느린 노년의 화면을 대비시키는 감독의 감각은 나빠보이지 않았다.  


프레드 벨린저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작곡했다던 '심플송'은 매우 현대적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지인이었던 걸로 나오지만, 스트라빈스키와 연결시키기엔 오히려 영국출신의 현대음악가 벤자민 브리튼과 연결되는 느낌이다. 성악가였던 아내, 그러나 치매에 걸린 아내를 베네치아에 두고, 요양원에 와 있는 이 남자. 프레드. 그에게 이제 사랑의 시간은 견고하게 응결된 빙하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내만이 부를 수 있다'라는 조건을 말할 때, 어찌나 슬프던지. 




이 영화에는 앞에서도 밝혔듯, 기록하며 복기하고 싶은 대사들이 참 많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런 대사가 진부하다고도 하던데, 글쎄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노년의 미덕 따위를 찾아볼 수 없기에, 나로서는 좋았다. 우리는 흔히 젊음과 노년이란 두 세계를 명쾌하게 구획하는 일종의 기준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생물학적인 나이가 젊어도 사고는 노인에 가까운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떤 특성별 유형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적절지 않아 보인다. 젊은 시절에 어떤 상상과 열정, 사고와 태도를 갖고 살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노년이 되면서 바뀐다는 식의 결정론도 싫다. 


생은 결코 그렇게 급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휘자 프레드의 대사 중 "경솔만큼 거부하기 힘든 유혹은 없다"란 대사가 계속 머리 속을 떠돈다. 젊은 날을 반추할 때, 항상 젊은 날의 경솔함에 대해  함부로 '반성문'을 써내는가. 오히려 이런 판에 박은 반성문쓰기보다 노년의 시간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 뭘까라고 묻는 것 같다. '지성인들은 취향이 없다'란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평생 지성인으로 살지 않았다'는 대사도 머리 속을 쾅 하고 때리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찾은 배우는 극에서 헐리우드 배우 지미 역으로 나오는 남자였다. 폴 다노란 배우였다. 그가 연기한 히틀러 역할은 그로 하여금 차기작을 기대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하게 만들었다. 지휘자와 배우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 프레디가 물었다. 노발리스를 아느냐고. 헐리우드 배우들도 영화가 끝나면 책을 읽는다며 애둘러 설명하던 노발리스의 이름이 들려서 기뻤다. 그들의 대화 속에 일부로 교묘하게 삽입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영화 미학자인 미리엄 한센은 <테크놀로지라는 땅에 핀 푸른 꽃>이란 자신의 논문에서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논문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새롭게 읽는다. 푸른 꽃이란 비유는 바로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가 쓴 작품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 유스에도 영화란 서사의 체계, 이야기 꾼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감독 믹이 나온다. 오히려 영화는 믹이 주인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년의 입장과 태도를 프레드와 믹을 통해 보여준다. 작가의 필명이었던 노발리스는 라틴어로 '새로운 대지를 개척하는 자'란 뜻이다. 젊음과 노년의 이분법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생을 어떻게 대면하고, 자신의 아름다왔던 시절을 빠른 속도로 누적되는 '노년의 생' 속에 어떻게 재배치 할 것인가. 지휘자 프레드가 입으로는 지휘를 더 이상 하지않는 은퇴자라 말하면서도, 드롭스 사탕 껍질을 부스럭거리며, 골든벨을 목에 맨 젖소들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모습은 눈물겹고도 아름답다. 


노년에 대해 각자가 내리는 정의나 감정은 다 다르다. 중요한건 사람의 생은 죽는 날까지 영혼의 대지를 찾아 떠나는 일이란 점일거다. 생을 대면할 용기와 생을 이끌고 아퀴짓는 열정이란 감정에 대해 묵상해봤다. 열정이란 결코 폐기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싶다. 열정의 이행과 이행 속에서 우리의 생은 그저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일 거라고 결론을 내본다. 이런 영화를 만나는 건, 작은 생의 기적이다. 영화란 서사체계가 여전히 힘을 갖는 이유겠지. 다음주엔 「브루클린의 멋진주말」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