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통의동 팔레 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강의가 있는 날이라, 강의 후 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갤러리들을 돌아다닐 참으로 산책에 나섰습니다. 진 화랑에 들러 좋아하는 큐레이터 신민씨도 만나고, 이후 팔레 드 서울에 갔습니다. 사진작가 윤광준 선생님의 전시 '달아난 시간의 발라드'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광준 선생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제 책『샤넬 미술관에 가다』가 나왔던 2008년 교보문고 예술 코너를 가면 베스트셀러 목록에 제 책은 7등, 1등은 바로 윤 작가님의 윤광준의 생활명품이었죠. 바로 그 책을 사서 읽으며, 무릎을 탁 쳤더랍니다. 생활명품에 대한 그의 관점,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물의 유용함과 그 내면의 데코룸의 문법을 찾아내는 그의 글은 압권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소리의 황홀』『마이 웨이-윤광준의 명품 인생』을 사서 읽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90년대를 견뎌낸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 양복과 흰 고무신, 인적이 드문 강남대로 등, 청담동을 무대로 살아가는 제게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었지요. 사진의 두 가지 기능은 기록과 정서의 재현일 것입니다. 특히나 사람에 관심이 많아, 시대의 형상 속에서 그 형상을 몸으로 체현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담았던 작가에게는, 기록이란 다큐사진의 미학을 논해야 할텐데, 유독 윤 작가님의 사진에는 다큐 내면에 푼크툼의 세계가 놓여있습니다. 작가는 오랜동안 간직하고 있던 필름 사진을 꺼내 디지털화했습니다. 아날로그의 기억을 표면으로 다시 끄집어낸 것은, 사진을 통해 시대의 긍정항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 사람들의 표정은 고단했으나 희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체념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던 시대, 가난했으나 서로를 돌아볼 여유는 외려 넘쳤던 시대, 산 자의 부끄러움이 절망으로 번졌던 시대, 힘을 모아 민주화를 이끌어낸 모두의 자부심이 영광으로 다가온 시대, 부끄러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보통사람들의 자화상들이 새삼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작가는 흑백필름이라는 기억의 화석에 아련하게 담긴, 추억의 무게를 끄집어내기 위해 최신 카메라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필름 사진을 수없이 반복 테스트를 통해 다시 찍었던 것입니다. 기억 속의 무늬와 빛깔의 톤을 복원할 때까지 재활영을 통해 되찾아낸 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발라드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진작품을 보고 있는데, 작가님이 인터뷰 중이셨네요. 인터뷰어가 알고보니 제 지인입니다. 사진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있는 분이지요. 제가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냈을 때, 저를 인터뷰해주셨던 인연으로 10년의 세월을 알고 지내는 분입니다. 이번 팔레 드 서울의 윤광준 사진전은 파버 카스텔에서 후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버 카스텔의 대표님도 잘 알지만, 윤 작가님에게 좋은 전시를 열어주신 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 처럼 글을 쓰는 이들에게, 파버의 만년필은 일종의 디폴트지요. 물론 제가 만나는 디자이너들에게 파버의 색연필은 기본값입니다. 필기구란 것이 결국 생각을 지면에 정리하는 수단이기에, 한 시대의 모습을 포착채 영상으로 정리하는 사진작업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네요. 결국은 뭔가를 쓴다는 행위를 확장하는 일이니까요.
요즘은 원고 마무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도 개정판을 내기로 한 후, 2년이 흘렀습니다. 옛 책의 원고를 고치고 또 탈고를 위해 달려가는 과정은 여전히 지난합니다. 하지만 원고도 저 작은 공란에 생각의 방식과 지금껏 다시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 넣는 이 시간이 참 좋더라구요. 지금의 이 모습을 찍으면, 사진으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지금이야 모든 사람들이 카메라로 자신과 주변을 찍을 수 있는 시대지만, 80년대란 그 짧고 명멸한 한 시대의 풍경들을 눈 속에 담다보니, 응답하라 1988년,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저 또한 고 2였다는 걸 다시 기억해봅니다. 기억은 항상 갱신되어야 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희망의 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참 제 마음 속에 오래 남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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