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빛으로 그린 그림

우리는 서로에게 왜 숲이 되지 못할까

패션 큐레이터 2013. 7. 1. 17:01


일요일엔 통의동 지역의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인사동에서 이쪽으로 

옮겨온 갤러리들도 꽤 된다. 사진 갤러리 류가헌에 갔다. 



요즘은 작은 공간들이 좋다. 북적거리는 인기좋은 미술관도 있지만 

종종, 전시가 인기라는 느낌보다, 누군가가 저걸 봤으니 그냥 따라보려는 이들

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소감 밖엔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냥 데이트 코스에 삽입된 

그런 자리 말이다. 전시 속 그림이든 조각이든, 모든 예술의 양식을 접하는 것은 

시간의 누적이 아닌 의미의 밀도가 만드는 일이다. 그것도 정직한 밀도. 



류가헌은 한옥으로 지어진 곳이라서, 작지만 예쁜 마당이 있다. 

그 위에 놓여진 두 개의 짙은 소반이 인상깊다.



류가헌에서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

이란 테마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라고 해봐야 앨범 제작과정을 

사진으로 담은 것인데, 세피아빛 사진들과 앨범제작에 함께해준 이들의 이름

을 찍어 올려놓았다. Acknowledgement를 참 잘했다. 부러웠다. 83년생의 인디뮤지션

최고은, 그녀의 음악을 듣기 위해 유튜브를 뒤졌다. 그녀의 음악을 들었다.



목소리에 실리는 힘에 균형감이 있다. 국악을 공부했던 재원이라고 

갤러리에 달린 기기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놓아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고 

이전에 발표된 노래까지 들어보고 있다. 머리 속으로 선율이 흘러간다. 



함께한 이들의 사진도 빼곡히 하나씩 찍어 벽에 붙여두었다.



사회는 점차, 모놀로그의 사회로 옮아간다. 다이얼로그에서 

모놀로그로. 타자성보단 내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의식에 강력한

관점이 부여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홀로있음과 외로움의 경계를 구분

하고 그 안에서 당당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모놀로그의 사회에 그저 친구가 되어준

작은 선율들, 오늘날 인디 뮤지션들의 곡을 듣고 있자면, 거대한 팬덤을 거느린 걸그룹들이 

보여주는 세계와는 판연하게 다른 세계를 맛볼 수 있다. 그들의 정신의 렌즈에 

걸려든 세상의 표면이리라. 이래서 인디음악을 더 좋아하게 되나보다. 

가수 최고은이 유럽에 진출하고 그곳에서 보낸 공연의 여정을

담은 사진들이 더욱 눈에 감기는 이유가 뭘까? 그녀의 

목소리가 대화를 거부하는 세상을 향한 작은 

모놀로그여서는 아닐까 싶다. 



음악을 듣고 벽면의 작은 구절을 되세겨본다. 최고은의 유럽 공연이 멋진 건

독일 음악 네트워크인 송스 앤 위스퍼스로 부터 초청 받아서 갔다는 점일거고, 큰 무대

에서 화려하게 노래하지 않고 일상에 스며드는 공간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유럽 여정을 담은 앨범  REAL(Record Everywhere About Life)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삶에 기록하는 모든 장소성에 대한 기록이다. 특정한 장소에서 그녀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선율을 기록하며, 그 순간을 만끽했을것이다. 



제작현장들을 담은 사진도 있도 함께 올려본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친구와 웃으며 밥을 먹는다. 예전 항상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굉장히 소원해졌다. 친밀과

소원, 친소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의 누적이 아닌 의미의 중첩이자 밀도의 풍경

이다. 인간과 인간이 모여 의미의 숲을 이루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산다. 오늘날, 우리가

서로에게 숲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함께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다가감에 대한 두려움, 그 비용이 너무 큰 사회를 우리가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슬퍼하진 말자. 누군가 토해내는 작은 신음소리, 독백의 

목소리 조차 듣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우리 자신이 썩어가고 있진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