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삶은 비극이다-영화 맥베스 단상

패션 큐레이터 2015. 12. 16. 13:34



#1

맥베스를 보았다. 대학시절 연극을 공부할 때,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세익스피어의 희곡들. 다행히 영문과에 세익스피어 전공 교수님 수업을 들을 수 있어 원전의 맛도 조금은 보았던 기억들이, 영화를 보는 순간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시간은 항상 당대문화에서의 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를 꽤 꼼꼼하게 공부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시대, 바로 르네상스가 자리한 정신적 위상과 그 속에서 태어나는 개인이란 개념의 탄생을 이해해야만, 셰익스피어 작품의 상당부분이 그나마 읽힌다. 



#2
맥베스하면 우선 영화로 만든 이들부터 떠오른다. 오손웰즈와 로만 폴란스키가 있다. 그러고보니 1957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제작한 <거미집의 성>도 맥베스를 토대로 영상텍스트로 확장한 작품이다. 물론 배경과 맥락을 완전히 탈바꿈시켜 만든 작품이었다. 일본의 전통적 연희양식인 노Noh를 빌려 표현한 탓에 솔직히 잘 안읽혔다. 개인적으로는 핵노잼. 오페라로 만들었던 베르디와 쇼스타코비치, 물론 쇼스타코비치의 관점은 맥베스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에 더 가있지만. 뭐 이런 작품들도 떠오른다.1971년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맥베스> 이후, 맥베스에 토대한 현대판 작업들은 계속되었다. 




2006년 마이클 스탁스 감독이 만든 미국 텔레비전 영화 맥베스가 있고, 2010년엔 호주에서 죠프리 라이트 감독이 만든 영화 <맥베스>도 있다. 미국판 마이클 스탁스의 맥베스는 비즈니스 업계를 무대로, 성공의 야망에 빠진 사업가의 이미지로 맥베스를 그렸다.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꿈꾸는 중역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잔인한 방식을 사용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가하면 호주영화 <맥베스>에선 범죄조직을 배경으로 삼는다. 되집어보면 셰익스피어는 당대 사회의 다양한 맥락을 겉옷으로 빌려와서, 인간의 욕망과 파멸, 권력을 찬탈하는 자들의 오만과, 그 오만 앞에서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광기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사회가 변화하면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을 담아내는 맥락도 바뀌는 법일테니. 그들의 재극화도 나름 정당성을 갖는 것일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의 본질, 원형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겠지. 



#3
영화 속 두 주인공, 마리옹 꼬띠아르와 마이클 패스빈더의 연기를 꼼꼼히 챙겨보았다. 그 둘은 어찌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듯, 남성성과 여성성이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임을 보여주는 두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패스빈더의 연기도 마음에 들었고, 레이디 맥베스의 '여자'안에 갖히 남자의 욕망을 볼 때, 선뜻 두려움이 일었다. 특히 이번 맥베스는 연극무대를 그대로 영화로 옮긴듯한 인상이라, 배우들의 호흡과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사처리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고 보았다. 영화이론가 앤터니 데이비스는 셰익스피어극을 영화적으로 각색할 때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연극적 특성을 많이 보전하는 방법과 영화매체 특유의 문법과 시각을 감독이 재해석해서 옮기는 것이다. 이번 맥베스는 거의 전자에 가깝다. '거의'란 한정사를 붙인 이유는, 연극에 없는 일부 장면들 때문이다. 가령 맥베스 아기의 죽음과 같은 장면을 넣어 맥베스가 왜 권력을 더 탐하고, 유지하기 위해 광기에 빠졌는지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한 듯하다. 



#4
하지만 당신의 성품이 염려되어요. / 당신은 본래 너무 유순한 인정으로 차 있어서 / 지름길을 취하지 못하는 위인이에요 /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어 하고 /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 그것에 수반되어야 할 잔인성이 없어요......레이디 맥베스의 대사가 여전히 머리 속에서 아른거린다. 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존경하고 클래식으로 공부하면서도, 정작 공연과 영화 작품으로 대면하라고 하면 주저할까? 그러고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현대에선 일종의 지식인 하위그룹의 전유물처럼 취급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고전은 항상 인간을 소롯하게 만든다. 내면 한 끝단에서 두려움을 발산하게끔 한다. 왜 그럴까? 폭력과 권력이란게 의외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고, 야망과 소망의 차이, 그 경계선이 흐물거리기에. 




결국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선, 그의 텍스트에선 당대 르네상스적 산물이 아닌, 현재까지도 유효한 인간의 본질을 읽는 것이다. 그 본질이 불편하기에 대면하는게 싫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대면하지 않고는, 내 안의 폭증하는 무한질주의 욕망을 반추하거나, 비춰볼 수 없기에, 그 불편함은 삼키고 또 삼키어야 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종말을 앞둔 맥베스의 대사가 떠오른다.


 "인생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주어진 시간동안 무대 위에서 으스대고 안달하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는, 인생은 바보들의 이야기, 함성과 아우성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맥베스를 본 이후의 여운이 여전하다. 꽤나 오래 앓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