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청바지 클래식

서울예술단의 <이른 봄, 늦은 겨울>-매화에 관한 문화관찰기

패션 큐레이터 2015. 3. 23. 15:22



매화, 고결한 너에게 보내는 편지


지난 토요일,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을 보고 왔습니다. 작년에 보았던 <잃어버린 얼굴>1895에 이어 서울예술단이 해마다 내놓는 창작극의 양상은 꽤 고무적이긴 합니다. 전통적 관점의 해석을 넘어, 연극적 구성에 가까운 무대를 통해 우리의 소리와 몸짓을 보여주는 것도 좋고요. <잃어버린 얼굴>에서는 명성황후의 사진을 모티브로 하여 그녀의 얼굴을 찾아가는 사건을 다루었고, 이번 <이른 봄, 늦은 겨울>에서는 늦은 겨울과 이른 봄을 관통해, 짧은 시간 명멸하듯 피어나는 매화를 소재로 우리 선조들의 매화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냈습니다. 



매화, 삼국의 우주, 그 상징성에 대해


꽃 한 송이 흔들리는 것도 우주의 떨림이 있기 때문이라지요. 봄날, 유독 실내에 갖혀 원고들을 쓰고 있자면, 이 말의 속살이 제게 자꾸 제 살과 비벼 간지럼을 태우는 탓에, 꽃 한 송이의 살풀이가 그립습니다. 혜화동으로 나가 주말 저녁을 고스란히 한 편의 공연에 오롯하게 시간을 투자하기 힘든 시점이지만, 그래도 공연에 대해서는 꽤 오랜동안 글을 써왔던 저널리스트로서, 패션과 미술, 음악이 곁들여진 공연을 보는 것은 항상 공부의 시간이자, 타인의 작업을 통해 제 자신의 모습을 재차 바라보는 거울같은 것이었습니다. 매화란 꽃은 매란국죽, 4개의 선비를 표상하는 꽃의 표두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우리에겐 다양한 문화의 심층적 상징의 총체입니다. 이런 매화에 대한 단상을 무용과 노래로 풀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삼국은 매화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명칭해왔고, 매화와 함께 아로새겨온 문화의 양상도 각양각색입니다. 중국은 매(梅)라 불렀고, 한국에서는 선비들 사이에서 상용되면서 고유어 없이 화(花)를 덧붙여 매화라고 했습니다다. 일본에서는 매실을 훈제시켜 약용으로 쓴 오매(烏梅)의 한자음에서 따 우메(ウメ)라고 불렀지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매화의 희고 정결한 모습에 반해왔습니다. 얼음같은 살결과 옥의 뼈를 가진 꽃이라 칭했던 것이죠.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꽃에도 뼈대가 있다는 생각, 늦은 겨울에서 봄의 환절기까지, 그 관절을 환절하지 않을 꽃이라 믿는데는 이유가 있었을거란 거죠


게다가 매화가 피기 시작하는 늦은 겨울, 이른 봄이 되면 꽃을 찾아 산야를 소요하는 탐매(探梅) 같은 풍습들도 옛 선인들에겐 주요한 풍류의 일환이었습니다. 극도 첫 장면에서 매화의 진정한 가치를 '느림'과 '여백'으로 풀어내려는 듯, 다도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른 봄에 딴 매화를 말려 얼려두었다가, 따스한 물에 녹여내, 봄의 기운을 맛보던 현명함에 취해야 했습니다. 



매화, 무대에 서다


매화에 대한 단상을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13개의 시퀀스를 만들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탐매행>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연출을 맡은 임도완씨의 노트를 보니 매화와 함께 하는 망중한의 풍류를 그리고 싶어서 '매화를 견고하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대신 그저 닮으려 했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문제는 시퀀스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느낀 것이고 조금 더 절제와 압축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적어도 제겐. 매화의 옥같은 뼈를 언어와 노래에 담는 일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마냥 늘어놓는 느낌도 없지 않아서 중간부분을 넘어가면 관객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드는 호흡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워요. 



이번 공연에서 압권은 영상과 무대 디자인입니다. 서울예술단의 공연을 보면 무대 구성 하나 만큼은 조밀하게 해낸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만큼 한 씬별로 조탁하는 능력은 좋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야기 구성의 수미상관을 맞추기 위해 극의 시작과 끝을 미술관의 그림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으로 마무리 한 것도 깔끔한 연출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예술단의 공연은 전반적으로 채도가 너무 높은 직물로 구성된 한복을 입는 느낌입니다. 화려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시각적으로 지치는 느낌이지요. 소품과 의상은 화이트 앤 블랙으로 꽤 선명하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고, 소품도 이에 맞추어 마치 일본의 '와비와 사비'를 보는듯한 선적 느낌을 담아냈는데, 이 느낌이 무대디자인과 서로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참 아름다운 한 편의 매화의 초상화를 본 듯한 느낌입니다. 무용의 동세들은 진부함을 벗어버렸고 의상은 서구복식의 논리를 차용했지만 차가운 겨울날에도 꼳꼳하게 지조를 지키는 매화의 뼈를, 그 정신의 척추를 표현하기 위해 코르셋의 속살을 나무로 표현해 반투명의 옷 안에 설치한 것도 좋았고요. 개인적으로 배경음악이 배우들의 목소리와 엉키는 첫날 공연이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원래 연희양식은 첫날 공연이 제일 힘든 것이죠. 그런데 제일 먼저 보고 글을 써야 하는 입장이니, 배우들이 조금 몸이 풀리고 무대에서 익숙해질 그때의 모습을 보기가 쉽질 않네요. 



언손을 호호불며 가야할 길


매화꽃 내리는 계절, 그 시간 아래 푹 젖어 지금껏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꽃 한 송이의 이야기를 거대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점, 이것 만으로도 이번 창작극의 매력은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단, 압축된 리듬과 구성상의 밀도는 잃지 않아주시길 바랍니다. 연출의 작위성 보단, 옛 선인들의 해학에도 골조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그 골조를 이야기로 재해석하고 풀어내는 일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배우들이 부르는 탐매송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 가사 하나하나가 머리 속을 휘젖는 느낌이에요. 매화를 보러 가는 길은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옛 선인들도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결연하게 매화를 찾아간 것이겠지요. 언 손을 호호불며 아직 얼어붙은 강의 표면을 건너야, 다가오는 봄의 기운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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