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아트센터의 큐브 미술관에서 열릴 <현대미술, 런웨이를 걷다>
의 도록 서문과 담화록을 작성하고 나니 새벽을 넘어 아침이 되었습니다.
패션 큐레이팅을 시작하고 나서, 마음의 습관처럼 남아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신예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눈에 꼭 담아두는 일입니다. 서울창작패션스튜디오를 비롯
신예 디자이너들을 육성하려는 정부차원의 노력에는 항상 고마움을 표합니다.
단 그 노력이 단회적이고, 장기적인 육성 플랜을 갖지 못해서 아쉽죠.
패션과 미술의 크로스오버가 시대의 대세가 된 지금에도
결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제대로 몫을 해줘야 전시가능한 작품이
나옵니다. 이번 서울패션위크 때도 제너레이션 넥스트 무대를 더 관심을
갖고 봤습니다. 그렇다고 기성 디자이너들의 무대를 제대로 보지 않았던건 아니고요
새로운 시선과 시선이 부딪힐 때, 관련된 예술의 각 영역에도 타가수분(Cross Pollination)의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지난 세월의 이력과 작업내용에만 안주해서는 안되는 이유지요.
이번 제너레이션 넥스트에서 제 눈길을 끌었던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서병문이란 디자이너에요. 런던 컬리지 오브 패션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패션 트랜드 예측회사인 WSGN에서 수여하는 글로벌
패션 어워드 부분에서 신인 디자이너 상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건 컬렉션 라인 전반을 이끌어가는 정조와 느낌입니다.
옷은 감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건축과 같은 설계도면과 이음새를
연결하고, 옷을 입는 신체의 3차원의 특성을 배려하여 구축하는 집과 같아서
아무리 멋져도, 그 멋이 신체에 착장한 상태로 오래가려면 사용된 소재와 안감, 외피의
구조선이 얼마나 견고하게 재단되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참신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옷의 핏을 무시한 수많은 옷들을 보다보면 한숨이 나지요. 그런 점에서 처음에는 이
디자이너의 비대칭 라인의 옷을 보며 약간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옷을 보니 의외로 튼튼한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옷은 인간의 신체를 균등하게 혹은 불균등하게 분할해서
그 조각난 피스들을 맞춤으로써, 옷이라는 형상을 만들어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정교한 규칙성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조각들을
창작을 위해 이질적인 부위에 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형의 구성원리를 따릅니다.
이번 컬렉션의 테마는 "I'm Censored" 이고 "Find Hidden Construction"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더군요. 역시 건축적인 상상력을 꽤 많이 빌려왔구나 생각했는데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건축은 실공간과 허공간, 그 사이에 존재하는 텅 비어 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보이드라는
공간,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 고도의 게임입니다. 그가 하이엔드 텍스쳐의
인공직물과 자연직물을 덧대고 포개어 이질적인 세계들을 껴안는 방식이 유연하고
무엇보다 이음새 간의 빈 틈이 없이 견고한 면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성복을 좋아하다보니, 사실 책을 쓰고 비평을 쓸 때도
여성 디자이너들과 여성복에 대한 생각을 많이 담았습니다. 최근
남성복에 대한 심도깊은 글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써야 할 일이 생기면서
예전에 머리 속으로 공부만 했던 수트의 문법에서 부터 남성복의 역사와 미학에
대해서도 새롭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복종을 공부한다는 것은
제겐 새로운 전시품목이나 테마가 생겼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디자이너의 옷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꼭 사거 입어야겠구나
마음을 먹게 되네요.
왜 디자이너는 이번 컬렉션의 테마를 '감시당하고 있는' 자아로 삼았을까요?
패션화된 사회에서, 자유로운듯 하지만 실제로는 유행이란 강력한 삶의 문법에 매몰되어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이제 남은 한 켠의 자유란 내가 입는 한 벌의 옷을 나 만의 방식으로 해석
해서 입어야 하는 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뭐든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부딛히려면 바로 지금, 나 자신의 숨겨진 구조와 힘의 실체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도 디자이너는 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씩 깨달아가며
자신의 면모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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