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술작가 전광영 선생님의 도록을 받았습니다. 전통한지를 이용해 형상을 조형하고 이를 집적시켜 거대한 이미지의 흐름을 만드는 작품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티로폼 조각을 한지로 일일이 싸서 집적시켜놓은 것이죠. 작업 자체가 묶음으로 되어 있어,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를 이룰 경우 이는 표면의 돌기와 돌기 사이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허공간, Void가 만들어져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깊은 사유에 빠지게끔 하는 힘이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의 작업은 곧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은유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집단과 개인의 문제, 개체와 군집의 문제를 다룹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이에 대한 처방으로 박유하 교수의 글이 주목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 또한 담론에 대해 반대와 찬성이 갈리면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죠.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입니다. 물론 박유하 교수의 말대로 그들 중에는 권력화된 이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개체로서의 한 개인이 역사의 범죄 앞에 노출되어 감내해야 했던 시간의 의미를 퇴색시키긴 어렵겠지요. 이렇게 어떤 사안에 대해 개체와 군집화된 인간들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광영 작가님의 작품의 의미가 유독 와닿았던건 그런 맥락이겠지요. 최근 Skira Rizzoli에서 전광영 선생님의 도록이 나왔습니다. 외국에서 오히려 더 많이 인지도를 넓히는 작가군들이 등장한다는 건 참 좋은 일이죠. 물론 생각없이 그저 자신의 이력서에 한 줄 올리기 위해 단행본을 내는 교수들도 많이 봤습니다만, 어찌되었건 우리의 문화가 다른 언어로, 텍스트로 만들어져 알려진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힘을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니까요. 외국인들도 이 한지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최근 인터넷을 보니 미술학자가 이 한지의 물성과 역사를 연구해놓은 책도 펴냈더군요. 한지를 우리의 종이라고 규정해도 좋지만, 그것이 왜 우리의 종이인지, 우리의 종이이기에 어떤 미적 특성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의 세계와 미적 담론에 접근하는 한 방식이 될 듯 합니다. 결국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누적된 시간의 힘'이란 것은 곧 우리들의 역사요, 그 속에서 버티고 또 버텨온 실존하는 인간들의 일어섬입니다. 일어설 수 있기에 지금 발 붙이고 서 있는 땅에 흔적을 남기죠. 저는 구체성을 띠는 삶을 좋아합니다. 관념사와 지성사로 얼머무린 말의 성찬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 해온 견고한(hard)한 사실들을 만들어온 사물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이란 사물을 생각해보면, 우리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은 이 종이란 일상의 사물과 매우 친숙하다못해, 집을 짓고 장식하고 약을 포장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것을 사용해왔죠. 사용하다보니,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가 베어나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하나의 사물은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전하는 매게가 됩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섬세하게 밝혀내지 못했던 물질문화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죠. 옷은 가장 대표적인 누적의 체계이구요. 물론 버려지기도 하지만 곱게 한 계절을 버틴 후, 다음을 위해 곱게 개켜서 서랍장에 들어가는 저 한 벌의 옷이야말로 우리가 숨쉬고 먹고 사랑하고 놀고, 휴식하며 즐겨온 시간의 표징이잖아요. 아마도 제가 전광영 선생님의 저 지리한 작업들을 보며 감탄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인간의 누적된 반복은 때로는 근거없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기도 하고 잘못된 정신의 습속을 들여, 그의 온 생의 측면을 흐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복은, 지속을 통해 끊임없이 내 안에서 미쳐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내는 노력이기도 하죠.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같은 좌표값을 향해 돛을 여는 것이니까요. 비오는 토요일입니다. 마르탱 파주의 '비'나 한번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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